오래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고층 건물에 불이 났는데, 기자 2명이 건물에 있다가 탈출을 시도했다. 불이나자 한명은 계단으로 아래로 내려왔고, 다른 한명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계단으로 내려간 사람은 무사히 내려갔지만, 옥상으로 올라간 사람은 불길이 점점 심해져서 옥상위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옥상의 전선줄을 붙잡고 옆 건물로 피신하다가 그만 전선줄이 끊어져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한 사람은 생명의 길을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망의 길을 선택했다. 마태복음 7:21-27은 우리에게 영적 생사의 갈림길을 가르쳐 준다. 한 길은 사는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죽는 길이다. 한 길은 순종의 길이요, 다른 한 길은 불순종의 길이다.
마태복음 7:21-27은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5:1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에서 가르친 말씀이라고 해서 산상수훈이라고 부른다. 군중들도 함께 있었지만, 말씀을 들은 일차적인 청중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친 말씀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결론 부분에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로 말씀을 맺고 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건축자이고,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건축자인가? 지혜로운 건축자는 산상수훈에서 가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인데, 이를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로 비유하고 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이 집은 끄떡도 없다. 왜냐하면 반석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건축자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자인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이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곧 무너져 버린다. 비, 창수, 바람 등은 인생의 각가지 환란이나 핍박을 상징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인생의 풍파가 닥친다 해도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세운 집처럼 환난이 닥칠 때 곧 넘어진다는 비유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진정한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산상수훈 결론 부분에서 명료하게 가르친다. 주님께서 가르친 말씀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가 바로 진정한 제자를 가리는 시금석이 된다.
현대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순종을 하나의 옵션 정도로 여긴다. 자동차에 붙은 선택사양 정도로 생각한다. 네비게이션은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어도 차가 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다. 순종을 이런 선택 사양 정도로 생각한다. 그런데 순종은 자동차 바퀴처럼, 자동차 엔진처럼 중요한 것이다. 자동차 바퀴나 엔진이 없으면 차가 아니다. 순종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이 바로 그 진실성의 표지가 됨을 본문은 입증한다. 진정한 제자의 표지는 순종이다. 야고보서는 가짜 믿음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어떤 믿음이 가짜 믿음인가? 순종이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야고보서 2장에는 이렇게 가르친다.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 .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은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런 믿음이 구원하겠는가? 진짜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있어야 한다. 순종이 없으면 가짜 믿음이다.
그렇다면 구원 얻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행동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주여 주여”라는 말은 신앙고백적인 표현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몹시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의 고백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누구나 이런 진정한 고백이 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7:21에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바로 따라오는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다. 말로만 “주여 주여”라고 고백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뜻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에 간다는 뜻이다.
주님은 또 대조해서 말씀하신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7:22). 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주님 제가 목사였습니다. 제가 장로였습니다. 제가 권사였습니다. 제가 안수집사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심지어 주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적과 표적을 행했습니까?”라고 이들이 행한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주님의 책망은 단호하다. 영어 성경에 보면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I never knew you). “내가 너를 안 적이 없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신다. “불법을 행하는 자”란 표현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순종이 없는 직분이나, 순종이 없는 기적과 표적들은 주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시는 바는 “주여 주여”라는 빈껍데기 고백을 하지 말고,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고백대로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이 전제된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고백에는 주님을 따르고자하는 대가를 치룰 결단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진정한 고백에는 자기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라고 말씀하셨다.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는 진정한 제자가 치러야할 대가가 무엇인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잘 보여주었다. 본회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값비싼 은혜]는 왜 값이 비싼가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제자도의 본질이 들어있는 말이다. 그는 이 말처럼 살다가 죽었다. 그는 미국에서 안전하게 살수도 있었지만 제자도를 실천하기 위해서 독일로 돌아가 나치에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본회퍼 목사는 그의 책에서 현대 교인들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현대 교인들이 너무나 값싼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값싼 은혜는 현대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라고 했다.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값싼 은혜란 시장에서 싸구려 물건처럼 팔리는 그런 은혜이다. 성찬과 죄의 용서, 종교의 위안물들이 싸구려 값에 내던져 버려지는 것이다.
값싼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이나 죄의 용서를 마치 머리로만 동의함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값싼 은혜란 죄인을 의롭게 함이 없이 죄를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값싼 은혜란 회개 없이 용서만을 설교하는 것이고, 교회의 권징 없이 세례를 주는 것을 의미하고, 죄의 고백 없이 교제만을 원하는 것이고, 개인적 신앙고백 없이 용서를 외치는 것이다. 값싼 은혜란 제자도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살아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값비싼 은혜인가? “이는 따르는 자의 생명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요, 이는 사람에게 유일한 진짜 생명을 주기 때문에 (값비싼) 은혜이다. . . 무엇보다도 이는 하나님에게 그의 아들의 생명이란 값을 치렀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 . 하나님께서 비싼 값을 치룬 것은 우리에게 싸구려가 될 수가 없다.” 본회퍼의 말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가 어떤 각오로 주님을 쫓아야 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준다.
아마 당신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예수 믿기 이렇게 힘들어서 누가 믿겠는가? 우리는 또 다른 극단을 조심해야 한다. 마태복음 7:21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100%로 순종하는 자가 돼야 한다는 뜻인가? 아무도 그렇게 100%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탁월한 영성가인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관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순종을 절대적인 완전의 개념에 연관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명령들을 한꺼번에 생각하며 이 명령들이 가리키는 모든 장점들을 한꺼번에 생각한다. 또 그들은 모든 순간마다 완전하게 행하며 모든 장점들을 다 가진 사람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머레이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의 수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그날 그날의 순종만을, 아니 시간 시간마다의 순종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는 내가 정말 자신을 바쳐 알고 있는 모든 명령들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보고 계신다. 또한 그는 내가 참으로 그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사모하며 배우고 있는지를 보고 계신다.”
이 정도면 누구나 주님께 순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주님은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 이 말씀을 하시지만, 어떤 누구도 산상수훈에 나오는 교훈을 100%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가 마음속으로 미워해 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누가 마음속으로 더러운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니도록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이 요청이 우리의 결단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순종하자. 주님은 우리에게 이 정도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순종할 때 2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한다.
첫째, 율법주의적 (legalism) 태도를 경계하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모습은 대표적인 율법주의적인 모습이다.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좋으나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기계적으로 지키려는 오류이다. 이런 율법주의적 태도 때문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친다고 정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또 그렇게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자신의 의를 삼았다. 여기서 교만이 나오고 여기 우월의식이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순종하면서 바리새적인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함이 없이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려는 자세를 조심해야 한다. 이런 기계적인 순종에는 말씀을 지키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둘째, 도덕률 폐기론적 (antinomianism) 태도를 경계하라.
순종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도덕률 폐기론이다. 이는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자유다.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도덕률 폐기론적 오류도 교회사에 가끔씩 나타났다. 초대교회 시대에 영지주의 이단들이 그랬다. 이들은 구원받았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현대에 와서 구원파가 바로 똑같은 오류에 빠져있다. 구원을 얻었으니 그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이다.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이 세월호 침몰 사고를 낸 배경에는 그의 잘못된 이단사상이 도사리고 있다. 구원을 얻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도덕률 폐기론적 태도가 그의 사상에 깔려있다. 그러니 불법으로 배를 뜯어 고치고, 불법으로 과적을 허용하고,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불법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직원들은 일용직이나 낮은 처우로 고용하여 사고의 원인을 제공했고, 각종 비리의 온상이 된 것이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철학과 교수 중에 이런 이단에 빠진 분이 있었다. 그 교수가 자기 교회에 와보라고 수업시간에 선전했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구원파나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이었다. 나중에 그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교수님, 왜 그런데 빠졌습니까?” 그 교수 왈, “예수 믿고 순종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 . 그래서 늘 마음이 괴로웠는데, 그런데 여기 갔더니 구원 얻은 후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해서 이제 자유를 누리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자유는 가짜 자유이다. 이런 이단이 영지주의 이단이요, 지금 구원파 이단의 가르침이다. 이런 도덕률 폐기론적 사상들은 순종을 어렵게 만든다. 요즈음 많은 현대교인들이 구원파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따 놓았으니, 이제는 적당히 신앙생활하면 되지 뭐 그리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하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도덕률 폐기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셋째, 주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주님의 방법은 이 두 가지 극단을 묘하게 피해가는 길이다. 이 방법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계명을 지키는 방법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3번씩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14:23).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한다. 직장 상사를 사랑하면, 상사의 말에 순종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순종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이다. 강압적으로나 기계적으로 지키는 순종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다. 주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십자가 지신 것을 눈으로 보았다.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은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순교를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안 된다. 주님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면 계명 순종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순종의 비결이 있다. 순종은 계명 자체를 지키라고 한다고 되는 것 아니라, 주님 사랑하게 되면 지키게 된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라고 하셨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순종의 동기이다.
순종하는 삶은 우리의 영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해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대로 순종할 때,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아무리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 새벽기도, 골방기도를 많이 한들 순종하지 않으면 그의 기도의 영성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순종 없는 기도에 영성의 능력이 나타나겠는가? 우리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이 말씀은 주님께 순종하는 자라야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주님께 순종하는 자라야 주님께서 그에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 “나타내리라”(헬, 엠파니조)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단어는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 사용된 단어이고 칠십인역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사용한 단어이다. 이에 착안하여 카슨이라는 학자는 이 말은 제자들에게 부활 이후에 나타나신 것뿐만 아니라 그 이후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 28:20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일상에서 주님의 임재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종의 정도는 영성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 적용 질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아직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점검해보자. 혹시 나의 생각에는 도덕률 폐기론적인 생각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영역은 없는지 점검해보자. 보다 철저한 순종을 위해서 매일 묵상하는 말씀에서 얻은 교훈이나 설교시간에 들은 말씀 중에서 순종할 것을 꼭 한 가지씩 수첩에 적어놓고 삶에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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