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말씀을 통한 자기개혁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8:3).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일이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 이었다. 술관원은 왕의 술 따르는 자 정도가 아니라, 요즈음 대통령 비서실장처럼 높은 직위이다. 왕이 마시는 술을 선택해서 독이 들어있는 없나 시식을 하며 확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이 지극히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왕을 자주 뵙기 때문에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술관원은 다른 고위 행정직도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외경서인 토비트 1:22에 의하면 아히칼은 산헤립왕 때에 수라상을 주관하고 옥새를 보관하고 모든 행정 재무를 맡아보던 사람이었다. 에살하돈은 아히칼을 그대로 그 자리에 다시 임명하였던 것이다.”라는 기록을 보면, 어떤 술관원은 상당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를 겸직한 것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때가 주전 44612월경이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성벽이 없기 때문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이다.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느헤미야가 민족의 고난소식을 듣고 울고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는 모습을 보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느헤미야의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1:6-7).
 
느헤미야는 자신과 조상들이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애끓는 회개를 하고 있다. 그는 회개하며 조국을 긍휼히 여기시도록 기도를 드리고 있다. 민족을 사랑하는 한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생각하면서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늘 눌리는 큰 근심이 있다. 어느 날 왕에게 포도주를 드렸는데,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근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왕은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2:2)라고 느헤미야에게 묻는다. 왕 앞에서 근심이 있는 모습은 궁중예절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수심이 있는 얼굴로 왕 앞에 나타나면, 당시에는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얼굴에 수심 있는 자는 역적모의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느헤미야는 왕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란다. 그러면서 자신이 근심하고 있는 이유를 지혜롭게 왕께 말씀을 드린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한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2:3). 느헤미야는 왕에게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 최대한 지혜롭게 말을 한다. 아닥사스다 왕은 일전에 상소를 듣고 성전건축을 중단한 왕이다(에스라 4).
내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란 말은 고대근동에는 조상의 묘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동정심을 얻을 수 있는 표현이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집트 바로의 웅장한 피라미드를 보면서 이들이 얼마나 무덤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를 깨닫게 되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이때 느헤미야는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2:5)라고 요청한다.
왕은 느헤미야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왕은 느헤미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왕은 12년간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가 안전하게 예루살렘까지 가도록 군사를 보내어 호위하게 했고,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성문과 성곽 재건에 필요한 재목을 제공하도록 명한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주변국 총독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 보수공사를 완수하게 된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일곱째 달 첫 날에 예루살렘 수문 (물 길러 가는 성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70년간 포로생활 이후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변 나라들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살기는 힘든 상황이고, 영적으로도 피폐한 상태였다. 이방인들과 통혼했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레위인들을 부양할 수 없고,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인 권력자들은 이방인들 지도자들과 내통했다. 내부에 스파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들은 놀라운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느헤미야 8:1-18은 이들이 경험했던 영적 부흥의 비결을 소개하고 있다.
 
(1)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5)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13)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18)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8:1-18).
 
이 본문은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영적으로 시들어갈 때, 어떻게 위대한 영적인 갱신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위대한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된 4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은 말씀에 갈급해 했다.
이들이 말씀에 대한 갈급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요청하고 있다. 시간이 되어서 설교를 듣는 식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말씀을 사모해서 에스라에게 말씀을 가져와서 읽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인가!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6시간 동안 계속해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는 진지한 자세인가? 영적 부흥의 첫 신호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개혁은 내 마음 속에 이런 말씀에 갈급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함을 주신다(107:9).
일전에 하늘에 속한 사람이란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다. 저자는 윈 형제라는 분인데, “하늘에 속한 사람은 이 저자 윈 형제의 별명이다. 윈 형제는 중국 지하교회 대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약 20여 년 신앙 생활하면서 그의 사역을 통해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30여 회 이상 체포되어서 갖가지 고문을 당했고, 교도소생활만 약 7연간 하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문들을 당했다. 첫 투옥 시에는 주님의 능력으로 74일간 금식을 하였다. 금식 마지막 때 어머니와 아내가 면회를 왔는데, 그가 얼마나 말랐던지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몸에 있는 반점을 보고 알아보았다고 한다. 귀가 다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아내는 장담하지만 이 사람은 저의 남편이 아닙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3번째 투옥 후에 기적적으로 교도소를 탈출하게 된다. 하나님 은혜로 그는 중국에서 독일로 도망하게 된다.
윈 형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6세 때였는데, 예수님께서 암으로 다 죽어가던 아버지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시는 체험을 하면서였다. 믿은 직후 그는 성경을 얻기 위해서 몇 달간 밤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에 꿈을 꾼다. 어느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하인을 시켜서 자기 수레에 있는 떡을 붉은 봉지에 담아서 윈 형제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봉지에서 떡을 꺼내서 입에 넣자마자 성경책으로 바뀌는 꿈을 꾸었다. 윈은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온 집안을 뒤지며 성경을 찾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꿈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실망이 되었는지 엉엉 울었다. 그의 우는 소리를 듣고 윈의 부모는 이 아이가 밤마다 기도하더니 정신이상이 된 줄 알고, 아버지가 그를 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를 했다. ‘이 아들에게 성경을 주옵소서.’
바로 그 시간 대문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윈은 문 너머로 "혹시 떡을 가지고 오셨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래 자네에게 떡 잔치를 해 주려고 왔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꿈에서 본 그 하인들의 목소리와 똑 같았다. 두 사람이 붉은 봉지에 든 뭔가를 전해 주었다. 열어보니 성경책이었다. 꿈과 똑 같았다. 윈은 성경을 받아 들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렸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윈을 알고 찾아오게 되었겠는가? 사연은 이렇다. 한 노전도자가 문화대혁명 당시 예수 믿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런데 3개월 전에 이 노인이 환상을 보았는데, 숨겨놓은 성경책을 윈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다. 환상 속에서 윈의 동네와 집의 위치를 정확히 보여주었다. 노인은 성경을 상자에 담아 땅속에 깊이 묻어 두었다. 당시에는 성경을 갖고 있으면 성경을 빼앗아 불에 태우고, 온 가족이 끌려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노인은 환상을 본 후에 몇 개월이 지나서야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게 된다. 그는 성도 두 사람을 시켜서 밤새 걸어서 윈의 집에 와서 전해준 것이다.
그는 성경을 받아 들고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좋았으면 웬만한 성경은 통째로 외워버렸다. 곧 마태복음 다 외웠다. 신약 성경은 거의 다 외웠다. 밤에는 가슴에 성경을 품고 잠을 잤다. 어느 날 저녁 환상가운데 주님께서 , 내가 너를 나의 증인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날 새벽 4시경, 지난 번 꿈에서 떡을 준 그 노인이 윈의 꿈에 나타나서 너는 증인이 되어 서쪽과 남쪽을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때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해서 10대 소년으로서 첫 해에 2천명을 전도하였다. 그 이후 20년간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윈 형제의 이런 위대한 변화는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도 사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말씀을 사모하니,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성경을 그에게 보내주셨다. 말씀을 그렇게 사모하니, 웬만한 말씀은 다 외워버렸다.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자, 주님은 그를 중국 복음화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하셨다.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오늘날 중국 지하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은 이렇게 해서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중국의 많은 지하교회 교인들은 성경을 통째로 암송한다고 한다. 시편, 마태복음, 요한복음 등을 통째로 외운다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말씀을 암송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그렇게 사모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느헤미야 당시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성경학자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와서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말씀을 사모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기개혁은 말씀을 사모하는 데서 출발한다. 말씀을 늘 사모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말씀을 사모하면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암송하게 되어 있다.
 
둘째,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책을 펼 때에 일어서는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다. 집안에 어른이 오면 일어난다. 이는 존경의 표현이다. 이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발전한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인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는 모습은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에스라의 말에 공감한다는 표현이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는 모습은 진정한 예배의 모습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숭앙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기도원에 갔다가 집회 중에 마땅히 자리에 깔고 앉을 것이 없어서 성경책을 깔고 앉았다. 이분은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성경의 내용이 중요하지 책이 뭐가 중요한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뒤에 있는 사람이 성경책을 깔고 앉는다고 그를 나무랐다. 그래서 기도원에서 한바탕 다투었다고 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성경책을 깔고 앉겠는가?
더욱 큰 문제는 말씀에 대한 무관심이다. 성경책을 깔고 앉지는 안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모습이다. 일주일 내내 성경책을 한 번도 읽지 않는다든지, 성경을 예배시간에 찾아보는 것으로만 여기는 모습들은 모두 말씀을 경외하지 않는 태도이다. 과거 연애시절에 애인이 쓴 편지를 한 번만 읽어보고 홱 버렸는가? 몇 번이고 두고두고 읽어보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을 읽어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갖게 되어 있다.
 
셋째, 말씀에 눈물로 반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말씀을 듣고 다 울었겠는가? 율법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이 잘못 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도전 하면서 다가온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기분 좋게만 들린다면, 영적으로 심각한 병에 걸렸거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에게 안 걸리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다 걸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표준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조문들을 들을 때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마음으로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살인자다. 거짓말 한 번도 안 한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탐심을 가져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영적 우상숭배자들이다. 우리는 세리처럼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부르짖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말씀에 대한 반응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치고 들어올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나의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가 달렸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2:37)라고 반응했다. 이 회개의 반응으로 그날 3천명이 구원받았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은 요시야 왕 시대에 있었다. 요시야의 위대한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말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해서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다. 사반은 왕 앞에서 율법책을 낭독했다. 율법을 들은 왕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왕하22:11). 옷을 찢는 행동은 주로 회개할 때 취했던 행동이다. 왕은 하나님 말씀 앞에 떨면서 회개하고 있다.
그리고 요시야 왕은 발견한 말씀에 대해 하나님 뜻을 여쭈었다. 사람을 여선지 훌다에게 보내서 하나님 뜻을 확인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율법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이 땅에 진노를 쏟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요시야 너는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왕하22:19)라고 선지자는 전한다. 하나님께서 요시야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유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두 성전에 불러 모으고 율법의 말씀을 듣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세운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왕하 23:3).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국가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먼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원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꺼내서 기드론 밭에서 불살랐다. 산당에서 우상 숭배하던 제사장들을 폐했다. 악한 유다 왕 므낫세가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빻아버렸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앞산에 세운 아스다롯,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의 산당들 부수어버렸다. 석상과 아세라 목상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채웠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들 위에서 불살랐다. 그리고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죽였다.
요시야는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개혁을 단행했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23:24-25).
요시야의 이런 위대한 개혁의 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옷을 찢는 회개를 통하여 이런 개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들려주고 말씀 앞에 함께 회개할 때 일어난 일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찔러올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가, 아니면 냉담한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과 정반대의 사건이 신약성경에 또한 기록되어 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도 똑같이 마음에 찔렸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이를 갈았다. 그들은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다(7:54-60). 당신은 하나님 말씀이 마음을 찌를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순종으로 반응하는가, 아니면 반발하는가? “어찌 할꼬하면서 회개하는가, 아니면 이를 가는가? 베드로의 청중인가, 스데반의 청중인가?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운명은 결정된다.
 
넷째, 말씀을 더욱 사모했다.
첫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더욱 밝히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시 에스라에게로 모여들었다. 얼마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한 자세인가! 이들은 율법에 초막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초막절을 지키게 된다. 초막절(혹은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칭함)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에 하나인데, 715일부터 일주일간 지속되었고 첫 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로 모였다. 가을의 추수를 거두어들이고 감사하면서 드리는 추수감사 절기였다.
초막절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경험한 광야의 고초와 유랑의 장막(천막)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민족사적, 신앙적 해석이 가해져 절기 기간 중 야외에 나무 가지 등으로 임시초막을 만들어 거하는 행사가 되었다(8:14-17).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기억하고 또한 이 세상이 임시적인 초막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표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키면서 말씀에 심취하였다.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8:18)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초막절 일주일간 에스라는 매일 율법을 낭독했다.
71일에 하루 동안 말씀을 듣기 시작해서, 이제 초막절에는 절기 기간 중에는 일주일간 매일 말씀을 들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의 역사로 발전하게 된다. 말씀을 한 번 들음으로써 느헤미야 시대에 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면서 회개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9:1-3).
 
느헤미야 13장에 이르러 이들은 삶의 개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율법대로 이방인들과 분리했다. 포로귀환 이후에는 더 이상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성전 헌물 곡간에 있던 암몬 사람 도비야의 세간을 바깥으로 내던져버린다. 그곳에 성전의 그릇들과 곡식제물과 유향을 보관한다. 성전의 원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십일조를 드려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고,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이방인들과 통혼을 금했다.
삶의 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면서 서서히 회개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자기개혁으로 나아가는 4가지 단계를 보았다. 느헤미야의 개혁의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면 어떻겠는가? 매일 정해놓고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을 갖자. 매일 갖는 경건의 시간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일 년에 한두 번 기간을 정하고 성경전체를 통독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학생들은 여름과 겨울 방학을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직장인은 신년초의 휴일을 이용하든가, 아니면 휴가기간을 활용하여 성경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면서 삶에 적용하면 어떨까?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옹달샘을 깨끗하게 만들듯이,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말씀의 생수가 우리의 폐부 깊숙이 뿌리박혀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과 같은 옛사람의 모습을 반드시 정화시켜 놓을 것이다.
 
* 적용 질문: 지금까지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자. 매일 정해진 분량의 성경을 읽고 있는가? 만약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오늘부터 성경책을 읽을 결심을 해보라. 그리고 말씀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떤가? 말씀을 대할 때 경외심을 갖고 대하는가? 요시아 왕처럼 옷을 찢는 심정으로 말씀을 대하고 있는가? 매일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개혁하기 위한 영적인 일기를 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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