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자기부정은 성도의 삶의 핵심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9:23).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부터 이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렀을 때,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단순히 응한 자들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의 일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다.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이만하면 대단한 헌신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신앙고백을 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주님은 절대로 강제적인 신앙고백을 유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고, 바다위로 걸으셨고, 죽은 자를 살려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병에 짓눌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병자들을 고치셨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치병 사역과 그가 행한 기적과 이적은 그의 메시아 되심을 입증한 사건들이었다(10:38).
누가복음 918-27절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직후에 가이사랴 지역에서 하신 말씀이다.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은 그를 임금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무리를 피하여 가이사랴 지역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셔서 그곳에서 중요한 질문을 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들은 대로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모든 대답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답이 아니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했다. 용감한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했다. 다른 복음서에는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는 메시아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고백은 주님이 원하던 정확한 대답이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주님은 심히 기뻐하면서 베드로를 칭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이 시점까지 행한 모든 기적들을 통해 결국 제자들로부터 이 고백을 듣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입증했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 자신이 곧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믿음을 고백하길 원하셨다.
혹시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가? 걱정하지 말라. 수많은 기적을 보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하루 24시간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적어도 예수님과 1-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후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아보겠다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마음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마음 문을 열어주실 줄 믿는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자들이 확실히 깨달은 사실을 발견하고, 이어서 더욱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자신이 오신 진짜 목적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내용이 22절에 나온다. 예수님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후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후의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이때부터 세 번 분명하게 계시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다는 소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살아난다는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간청했고, 이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책망을 받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억만 죄악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오셨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달은 그 시점부터 자신이 오신 진짜 목적을 계시하기 시작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신 직후에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사건을 말씀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는데,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는가? 한때 어느 교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잘못 가르친 적도 있다. 심지어 찬송가 가사까지 바꾸어서 불렀다. 이는 모두 잘못된 가르침이다.
누가복음 923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꼭 필요하다. 주님의 십자가는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무시할 수 없다.
첫째, 대속적 의미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가 바로 대속적 의미의 십자가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일절 모방할 수 없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속물로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혔다(20:28).
둘째, 모범적 의미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따라야할 모범이라는 의미이다. 누가복음 923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전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우리가 날마다 져야하는 십자가는 바로 이 두 번째 의미의 십자가이다.
셋째, 승리의 상징인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의 권세를 깨뜨린 승리의 상징이라는 뜻이다. 골로새서 215절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는 세상 권세를 이긴 승리의 상징이다.
이 글에서는 누가복음 923절이 강조하고 있는 자기부정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를 지는 삶은 바로 모범적인 의미의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잘 지는 삶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진정한 제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잘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주님은 강조하셨다.
그런데 현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한다. 조금만 부담이 되면 떨쳐버리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본 훼퍼가 말한 것처럼 값싼 은혜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시대정신은 예수님의 정신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 지지 않는 신앙은 가짜 신앙이란 사실을 주님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7).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는 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가장 먼저 순종해야할 일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하는 일이다. 이 요청은 진지한 제자들에게 요청하는 첫 번째 요청이다. 이 요청은 제자들이 진정한 신앙고백을 한 직후에 요청한 것이다. 진정한 제자에게 신앙고백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진정한 제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요구된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제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질 수 있을까? 누가복음 923절에서 주님은 그 방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다.
 
첫째, 자기부정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가르친 후에 이어서, 주님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잘 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부정의 삶이다. 자기부정 없이는 절대로 자기 십자가를 제대로 질 수 없다.
칼빈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강요, 3권 제7장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자기부정이라고 했다. 칼빈은 우리가 자기부정을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소유를 잊어버리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으라(14:8; 고전6:19 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라(14:8; 고전6:19 참조).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자아성취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가 있다고 말한다. 자기부인은 자기의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다. 가치관이란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말한다. , 명예, 권력에 가치를 두던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치관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치변화의 길이 열린다. 믿기 전에 가치를 두었던 것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시간, , 정열을 어디에 쏟는가를 보면 안다. 내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곳에 나의 시간과 돈과 정열을 투자하게 되어 있다. 이는 말에 달린 것 아니다.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절대로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실례를 보자. 그는 100%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재물을 놓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보다 재물에 더 큰 가지를 두었기 때문에 주님의 요청을 따를 수 없었다. 그는 100% 계명을 지켰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치변화를 위해서는 나의 세상적인 가치관이 죽어야 한다.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야망, 나의 비전을 내려놓아야 한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내려놓지 못해서 제자가 되지 못했다. 당신에게는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이 방해가 되는가? 그 방해거리가 바로 자신이 죽어야 할 영역이다.
손현보 목사가 쓴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권사 한 분이 늘 세상일에 바빠서 새벽기도도 절반 밖에 나오지 않고, 고추밭을 관리하는데 온통 정신이 빠져 있었다. 이분의 즐거움은 고추를 잘 수확해서 자녀들에게 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손 목사가 여러 번 권면했다. 그래도 그 권사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 권사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밭을 다 뽑아 버려라.” 처음에는 주춤했으나 또 음성이 들렸다. 그래서 하나님 음성에 순종하여 고추밭을 찾아가서 고추를 약 삼분의 일 정도 남겨두고 다 뽑아버렸다. 그리고 딸에게 전화해서 손 목사가 고추밭에 가서 고추를 뽑아버렸다고 어머님께 연락하라고 시켰다.
나중에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뽑았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제가 보니까 어머니가 정신이 없는 사람 같은데 아무래도 오늘 밤에 큰 일이 날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어머니에게 가셔서 무슨 조치든지 취해주십시오.” 손 목사가 권사 댁에 찾아가보니, 그는 벽에 기댄 채로 실성한 사람처럼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권사님, 왜 그러세요?” 권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목사님, 제가 평생을 살면서 원수 맺은 사람도 없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없었는데 어떤 죽일 놈이 우리 고추밭을 다 뽑아놓았습니다... 그 놈이 누군지 알기만 해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그 놈이 나중에 우리 집에 불이라도 지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한탄을 했다.
권사에게 손 목사 자신이 고추밭의 고추를 뽑아버렸다고 하자, 권사는 손을 저으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손 목사가 고추를 뽑다가 벗겨진 손을 보이면서 내가 했다고 하자, 권사는 손 목사의 손을 한참 뚫어져라 보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목사님이 왜 우리 고추밭을 뽑습니까?”라고 했다. 손 목사는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손 목사는 권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릴 테니 대답 좀 해 보시라고 했다.
 
권사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예수님을 믿고 권사님까지 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마지막까지 증인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생각하고 지킨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지금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려서 말을 못한다고 하시는데, 예수 믿고 너무나도 좋아서 오늘처럼 심장이 떨린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전하다 죽을 영혼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너무나도 좋아서 심장이 떨린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수십 년 예수님을 믿으면서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까? 옆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오늘처럼 떨린 적이 있습니까?
 
권사는 눈을 감고 약 7분정도 지난 후에 손 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목사님,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이 고추가 뭐라고, 이 고추가 뭐라고, 지금까지 여기에 이렇게 온갖 정성을 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셔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다음 날 주일 새벽에 새벽기도에 나왔는데, 3개월 된 초신자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사연인즉, 손 목사가 권사가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고추밭에 고추를 다 뽑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초신자는 권사 밭 근처에 고추밭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않다가 자기 밭 고추도 뽑힐까봐, 그날부터 새벽기도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권사는 몸이 불편해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식혜를 만들어서 페트병에 담아 다니면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그해 12월 이 권사가 전도한 사람 11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권사가 부정해야할 것은 고추밭이었다. 주님의 일보다 고추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더 컸다. 고추밭 사건을 통해 주님은 이를 깨뜨리셨다. 세상 욕망이 깨어지자 그곳에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게 하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원리를 가르친다. 내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원리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4). 나를 내려놓으면, 영적으로 살게 된다. 그러나 나를 내려놓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는다. 부자 청년은 자신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놓쳤다. 내가 죽을 때에 살게 된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죽으면 산다. 낮아지면 높아진다. 버리면 얻는다.
조지 뮬러에게 누군가 질문을 했다. “당신의 사역의 성공비결이 뭡니까?”라고 묻자, 뮬러는
내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꿈, 나의 야망,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모욕에 대해서도 완전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도 자아가 죽을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할 줄 믿는다. 자기부정은 망하는 길이 아니라 진정한 영적인 승리의 길임을 주님은 분명하게 가르쳤다.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가 뭔가? 예수님이 달리신 형틀이다. 엄청난 고통과 수치가 따르는 형틀이다. 예수님도 정말 지고 싶지 않은 형틀이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흐르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왜 십자가를 져야하는가? 예수님 자신에게는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는 형틀이지만, 이것을 지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었다.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틀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예수님이 하나님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져야했던 고난의 형틀이었다.
우리의 십자가는 뭔가? 우리는 흔히 십자가하면 나에게 고통 주는 사람이 십자가라고 종종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른 뜻이 아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통스럽지만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일을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만 했던 십자가처럼, 우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이는 곧 우리가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내가 감당해야할 십자가를 뜻한다. 때로는 피곤하고 힘들고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는 중요한 방법이다. 나는 피곤하고 귀찮지만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나가는 모든 순간들이 십자가를 지는 순간들이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란 내가 감당하기 싫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말한다. 이는 곧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할 희생을 말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전도는 쉽지 않다. 때로는 모욕과 경멸을 당할 수도 있다. 나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십자가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십자가가 아니다. 주님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우리의 십자가인 것이다.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소그룹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순간이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일이다. 어느 날 저녁 소그룹모임에 피곤한 집사님을 전화해야 오시라고 했다. “목사님, 북한의 김정일보다 더 지독합니다.”라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하겠는가? 나도 얼마나 피곤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고 나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참석해서 말씀을 나누면서 어느새 피곤은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집사님 간증을 통해서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잘 져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오시라고 했다.
날마다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신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갈보리 산상에서 달리신 십자가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십자가 잘 지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십자가 지기를 결심하면, 십자가를 먼저 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는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실 줄 믿는다.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 잘 지는 우리가 되자.
 
* 적용 질문: 내가 지금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비록 고통스럽지만 충성스럽게 감당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라. 그리고 당장 삶에서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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