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보편적인 두 가지 방법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인도하시는 방법일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날마다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많은 경우에 우리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신다.
요즈음 부정한 뇌물을 받았다가 나중에 탄로 나서 형무소에 가는 사람이 많다. 만약 그가 성도였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뇌물을 갖고 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성경은 뇌물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친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뇌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신실한 성도라면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뇌물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결코 뇌물 때문에 올무에 걸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읽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그가 이런 말씀을 모른다면,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례를 따라 슬쩍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교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가가 하나님의 일상적인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바둑의 수가 높아지면 바둑의 길이 보이듯이,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게 되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묵상의 단수를 높이라. 그러면 그만큼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요한 일은 꼭 기도하고 시작한다.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한 수많은 간증을 듣는다. 우리 각자에게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수많은 간증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인 일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나 자신의 부끄러운 습관이기도 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요한 일뿐만 아니라 작은 일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그러므로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기를 원하신다.
나는 천안에 살면서 백석대학교 학부에서도 강의를 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했다. 대학원에서 강의하기 위해 차를 갖고 가게 되면, 때로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 고생한 적이 많았다. 어떤 때에는 강의시간이 바쁘고 해서 아무데나 주차했다가 티켓을 받기도 했다. 어느 학기부터 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했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잠깐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 서울에 강의가 있기 때문에 차를 갖고 가는데, 주차할 곳을 주세요.” 그 기도는 1분도 되지 않았다. 그 학기에 대략 반 정도는 버스를 타고 갔고 6회는 차를 갖고 갔는데, 그렇게 기도하고 갈 때마다 꼭 주차공간이 있었다. 아마 이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도하지 않고 갔을 때에는 두 번 중에 한 번은 주차공간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출발한 때에는 6회 중에 6회 모두 주차공간을 얻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대단한 것이다. 아니 그 이후에 어떤 때에는 서울 캠퍼스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도저히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때에도 기도하면서 들어가게 되면 놀랍게도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주차장을 떠나는 차가 있어 주차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아, 하나님께서는 사소한 일도 인도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는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 조이 도우슨 여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구체적인 한 사례를 들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물려주신 아주 아끼던 펜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펜이 없어졌다.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비서와 남편까지 동원해서 펜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도우슨 여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다. “전지하신 하나님! 당신은 그 펜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죠? 그리고 당신은 그 펜을 찾는 일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고 계시죠? 제게 그 펜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도슨 여사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즉시 한 문장이 마음에 떠올랐다. “사무실 화장실 안에 있단다.” 도우슨 여사는 이미 화장실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음성에 순종하고 다시 찾아보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 그 펜이 떨어져 있었다. 변기 뒤편 바닥에! 정말 하나님만이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을 아셨고 그분만이 내가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펜을 찾는 것과 같은 작은 일도 기도해야 하는가? 이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일상이 기도가 될 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할 중대한 실수를 막게 된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신이 헤어진 전대, 헤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 낡아서 기운 신, 낡은 옷, 마르고 곰팡이 핀 떡을 갖고 와서 멀리서 왔다고 하면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여호와께 여쭈어보지 않고 조약을 맺어버린다. 며칠 후 여호수아는 속은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멸절하도록 명령하신 가나안 7족속 중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멸절해야할 가나안족을 살려주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수 9:4-6).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고, 이들을 비롯하여 가나안 족들을 살려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멸망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
여호수아와 같은 영적인 거장도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면, 평소에 하나님께 여쭙는 기도의 습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중대한 일에 실수하기 쉽다. 여호수아와 같은 영적 거장도 실수를 했다면, 연약한 우리는 더욱 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매사에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기도의 훈련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이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3번째 중요한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는 오순절 이후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믿는 자의 마음속에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차원의 인도하심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이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오순절 이후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산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오시게 되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가르쳐주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성령님의 사역을 ‘가르치시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만 깨달으면 언제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요한복음 16:13에도 성령님께서 하시는 중요한 사역을 밝히고 있는데,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고 “장래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일을 하신다. 여기서도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은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일과 진리를 말씀하시는 일과 장래 일을 가르쳐주시는 인도의 사역이 주된 사역임을 밝힌다. 요컨데 성령님께서 성도의 속에 거하시면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를 ‘가르쳐서 인도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만 훈련이 된다면 언제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사역을 생각하면, 오순절 이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성도의 정상적인 삶이다. 이는 특별한 사도나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진 사역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누려야 할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광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난다. 그는 수레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이때 성령님의 음성이 빌립에게 들렸다.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행8:29).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빌립은 곧 행동으로 옮긴다. 빌립이 내시에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이사야 53장은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히 예언한 곳이다. 빌립은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질문한다. 내시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깨닫겠느냐고 반문한다. 빌립은 이사야 53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곧 물이 있는 곳에서 내시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행8:27-39).
사마리아 지역에서 전도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던 빌립을 성령님께서 갑자기 새로운 곳으로 보낸 일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마리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들린 음성이 성령님의 음성인지 빌립에게 의문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훈련된 귀를 가졌기 때문에 성령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는 곧 순종하게 되었다. 오랜 역사가 흐른 이후에 빌립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남겼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 영향력 있는 한 내시의 개종으로 말미암아 에디오피아에 복음이 일찍 전해지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에디오피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할렐루야! 한 사람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위대한 기적이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교회가 얼마나 성령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고 순종했는가를 알 수 있다. 수리아에 있던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선교사를 뽑고 파송했는가를 보라. 선교를 시작하신 분은 성령님이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선택하신 분도 성령님이시다.
선교지를 결정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성령님은 어느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어느 지역으로 가라고 환상을 주시기도 하신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9-10).
성령님은 어느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어느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도록 길을 여심으로써, 선교를 직접 지휘하심을 알 수 있다. 선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교사를 뽑는 일, 선교지를 결정하는 일, 선교사업을 주도하는 모든 일에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성공적인 선교를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선교사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저 내 힘과 내 열정으로만 사역해서는 결코 안 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선교지를 결정하신 분은 성령님이란 사실이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이 아시아 쪽으로 가다가 유럽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만약 성령께서 아시아 쪽으로 복음의 경로를 트셨다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복음을 훨씬 더 일찍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방향을 트신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평할 수 있는가? 선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성령께서 유럽 쪽으로 복음의 방향을 바꾸셔서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 고린도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복음은 로마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복음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땅으로 갔다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한국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민족으로 봐서는 슬픈 일이지만,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하셨는데, 우리가 불평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역의 주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선교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교사 선택과 선교지 결정 등 모두 성령님께 사역의 주권을 내어드려야 한다. 선교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사역의 주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려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다. 전도를 하든, 구제를 하든, 봉사를 하든, 교육을 하든,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그분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열심히 사역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사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관건은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어떻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성령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귀가 열려 있지 않으면, 성령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한다. 특히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나는 한 때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분명히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는 것이 중요한데, 나 자신이 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작심하고 기도원에 올라갔다. 기도원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제목을 분명히 정하고 갔다. “성령님과 더욱 친밀함을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소서.” 이것이 나의 기도제목이었다. 물론 내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분변하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기도의 응답들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성령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원에 올라가면서 바로 응답을 받았다. 내가 찾아간 기도원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미리 예약을 받지 않았다. 가서 기다리다가 방 배정을 받아야 했다. 도착해서 방 배정을 받은 후에 열쇠를 받기 위해서 선교관으로 찾아갔더니 직원이 식사하려고 가버렸다. 약 40-50분은 기다려야 했다. 그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나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아직 2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서 책들을 뒤적였다. 그런데 내가 갖고 온 기도제목에 정확한 답을 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을 사서 기도원에서 곧장 다 읽어버렸다. 책을 다 읽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이렇게도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인도하셨군요.”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발견한 책은 조태성 목사가 쓴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 필요한 중요한 훈련과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저자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제1체험: 예수 믿고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단계,
제2체험: 성령충만의 체험,
제3체험: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고 교제를 나누는 단계.
이 책을 읽기 전에 나의 삶은 주로 제2체험까지가 전부였던 것 같다. 물론 제3체험의 단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적인 훈련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도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산상기도회에 올라가면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했다. 성령충만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성령충만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성령충만 받는 것으로 그쳤지, 그 다음에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날마다 체험하면서 사는 면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했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교제하시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집에 귀한 손님이 들어오셨는데 그분과 대화도 하지 않고 그냥 둔다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우리가 믿을 때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셨다.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성령님은 믿는 순간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속에서 항상 거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왜 거하시는가? 그분은 일차적으로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과 교제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산다면 성령님께 얼마나 무례한 사람인가? 축도에 사용되는 축도문에는 성령님의 교제하심이 포함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여기 우리말 성경에 ‘교통’이라는 원문은 ‘코이노니아’라는 말인데, 이는 ‘교제, 사귐’이라는 뜻이다. ‘교통’이란 번역이 마음에 안 든다. 교통하면 ‘자동차가 왔다 갔다’ 하는 이미지가 생각난다. 코이노니아는 바로 성령님의 ‘교제’하심을 뜻하는 말이다. 성령님과 ‘사귐’을 기원하고 있다. 성령님은 우리와 사귀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와 사귀시면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을 뒷방에 모셔두고 교제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성령님께 무례한 사람인가?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헬라어, 퀴리오스)라고 부른다. 대부분 영어성경은 ‘여호와’를 대문자를 사용해서 THE LORD(주님)라고 표현한다. “퀴리오스”라는 말은 “소유자, 마음대로 하는 사람,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교제하시면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이끌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을 무시하고 대화도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산다면, 우리는 말로만 ‘주여, 주여’하는 것이지, 삶으로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에게 이런 경고를 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이 말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나의 인생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우리의 인생을 상의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참된 성도의 모습임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수없이 말을 걸지만 우리의 영적인 귀가 열리지 않아서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케네스 코플랜드 목사는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방송 전파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싶다면 나의 라디오를 튜너로 주파수를 잘 조정하여 맞추면 된다. 당신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절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방송국의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는 당신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정확하게 성령님께 주파수를 맞추면 된다. 우리는 때때로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들었다 말았다 하며 살아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파수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때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때로는 설교와 목회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때로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때로는 가족과 친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때로는 작은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때로는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서도 말씀하기도 하신다. 어느 목회자는 세속 영화를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4년 동안 강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분은 4년 동안 강단 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받았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의식적으로 성령님을 찾으라.
중세 수도사였던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이렇게 했다. “하나님께서 곁에 계신 것처럼 그분께 이야기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연습을 계속 하세요.” 불구자였던 로렌스는 수도원 식당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으로 경건하게 되자, 수도원장이 되었다. 로렌스의 경험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 연습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성령님께서 곁에 계신 것처럼 그분께 이야기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우리 속에 동시에 계신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그래서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 곁에 계신 성령님을 의식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훈련이 중요하다.
로렌스 형제가 하나님 임재 의식 속에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임재 의식 속에 살아가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시간을 정해놓고 얼마나 성령님과 교제하는지 점검해 보라. 1시간에 몇 번 성령님을 의식하는가? 10분 동안 몇 번 성령님을 의식하는가? 누구나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한다. 자신과 대화 대신에 성령님과 대화를 시도해 보라. 혼자 조용히 있을 때에는 소리를 내어서 성령님과 대화를 시도해 보라. “오늘도 좋은 날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잘 때도 마지막으로 성령님을 생각하면서 잠을 청해보라.
둘째, 성령님께 질문을 드리라.
뭐든지 성령님께 여쭈어 보라. 꼭 거룩한 일만 여쭙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을 상의하라. 주님은 우리의 거룩한 일에만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의 주인이시다. 예배, 전도, 구제, 봉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제생활, 가정생활, 자녀관계, 직장의 일까지 모든 삶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그분께 여쭈어 보시라. “성령님,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성령님, 텔레비전을 볼까요 말까요? 어떤 프로그램을 볼까요? 성령님, 이런 때에는 자녀를 어떻게 지도할까요? 성령님, 이 물건을 살까요 말까요? 성령님, 전도할까요 말까요? 누구에게 할까요?” 그 다음 성령님의 응답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하라, 하지 말라. 된다, 안 된다.”라고 응답하신다.
셋째, 성령님의 음성인지 분변하라.
그런데 이렇게 그분의 음성을 분별하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들린다. 귀로 들리는 것은 마귀 소리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들리는 음성이 내 생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음으로 들리는 소리는 3가지 방향에서 들릴 수 있다. 1) 내 생각, 2) 성령님의 생각, 3) 마귀가 주는 생각이다. 그래서 분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 생각이나 마귀가 주는 생각을 성령님의 생각으로 잘못 알게 되면 안 된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야구경기를 보면서 나는 종종 느낀다. 야구 심판이 홈베이스 뒤에 서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보고 어떤 것은 ‘스트라이크,’ 어떤 것은 ‘볼’이라고 분간한다. 훈련되지 않은 내 눈에는 볼이나 스트라이크나 분간이 쉽지 않다. 그게 그건 것 같다. 그런데 야구 심판은 정확히 분별한다. 눈이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훈련이 되면, 이 생각이 내 생각인지, 성령님의 생각인지, 마귀가 주는 생각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은 주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생각은 불안하다.
김하중 대사가 쓴 『하나님의 대사』에는 그가 어떻게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지 상세히 간증하고 있다. 처음에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게 된 것은 기도 중에 손이 올라가면서부터였다. 기도제목을 두고 기도하는 중에 손이 올라간 것은 모두 응답이 되었다. 손이 올라가지 않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약 일 년 반 동안 기도하자 팔도 아프고 시간도 많이 들고 해서 간단하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된다,’ ‘안 된다,’ ‘하라,’ ‘하지 말라’고 응답하시기 시작했다. 그는 고백하기를 사실 성령님께서 이미 이렇게 응답하셨지만 민감하지 못해서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님의 음성에 대한 영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훈련이 되면 성령님의 내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믿는 우리 속에 언제나 내주해 계시기 때문이다. 마음의 주파수를 성령님의 음성에 맞추는 훈련이 되면 언제라도 들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조태성 목사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이 경험한 간증을 하고자 한다. 정말 이 책대로 되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정말 성령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성령님께 질문을 드리고 응답을 듣기 위해서 마음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 기도원 첫날에 가니까, 화장실 있는 방이 다 나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7:30에 오면 번호를 줄 테니, 오후 1시에 와서 확인하라고 했다. 그런데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따로 방이 있는데, 지금은 알 수 없으니 내일 아침 9:30-10:00시 사이에 오라고 했다. 만약 목회자 방이 있으면, 아침 7:30에 갈 필요가 없다. 또 목회자 방이 없으면 괜히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사무실까지 아침 9:30-10:00시에 헛걸음 할 필요가 없다. 목회자 방만 믿고 아침에 번호를 받지 않으면 원하는 방으로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성령님께 여쭈어 보았다. “성령님, 목회자 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님은 “없다.”라고 응답하셨다. 다시 확인 질문 드렸다. “없다”는 마음의 음성을 확인했다. “그러면 아침 7:30시에 표를 받으면 오후 1시에 방이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있다.”라고 마음의 음성을 주셨다. 거듭 질문을 드렸더니, “있다”라는 마음의 음성이 들렸다. 그래서 아침 7:30에 가서 번호를 받았다. 이때 내게 궁금증이 생겼다. 정말 성령님께서 주신 음성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9:30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교역자용 방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가보았다. 정말 교역자용 방은 없다고 했다. 한 달 후까지 없다고 했다. 오후 1시에 갔더니 화장실 있는 방은 남아 있었다. 사실 오후 1시에 와도 방이 없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성령님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성령님이 내 속에, 내 곁에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그분과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라. 인격체이시기에 인격적인 대우를 하라. 죄를 지으면 성령님을 근심시킨다.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도움이 필요할 때만 성령님께 요청하는데, 이런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지속적으로 인도하시겠는가? 기도할 때, 설교할 때,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만 성령님께 요청하는 영적인 얌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평시에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중요하다. 그 다음에 성령님과 모든 일을 상의하고 일을 추진하라.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여쭈어보라. 교회 사역도 내 마음대로 “한다, 안 한다”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가? 먼저 성령님께 상의하라. 그리고 여쭈어 보라. 거듭 확인해보라.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구하는 자세이다.
대천덕 신부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놀랍게 경험한 분이다. 장을 보러 갈 때, 먼저 성령님께 장을 봐야 할 것을 미리 받아 적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에 가서 보면 꼭 필요한 것이 그 목록에 빠져 있곤 했다. 꼭 사고 싶지만 ‘차라리 불편을 감수하리라’라고 생각하고 안 사온다고 한다. 그렇게 지나다 보면, 그 필요한 물건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많이 체험했다고 한다. 대천덕 신부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 건너편에 앉은 아이가 초코파이를 먹고 있었다. 너무나 먹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충동적으로 사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회개하면서 사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얼마나 성령님을 의식하면서 살았기에 이런 고민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최고의 길을 터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 그리고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리라”(시32:8)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 높은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새시대가 열렸다.
넷째, 하나님 말씀으로 분변하라.
성경이 인간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 모든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근본적인 원리는 인생사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두 가지 질문을 해보라.
성경의 원리와 일치하는가?
성경의 원리와 어긋나지 않는가?
예를 들면, 성도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때로 질문을 한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담배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이 담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교회 교인들 중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데 마음대로 담배를 피워도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신앙인들 중에는 담배 피우는 것을 죄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자유가 있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게 된다면 그들의 마음에 죄를 짓게 만들 수 있다. 이 문제는 사도바울이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으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에 나온다.
고린도전서 8장에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사도바울은 설명하기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요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말이다. 이런 지식은 당시 소수가 가진 특별한 지식이었다. 그런데 유대전통을 지닌 성도들 중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교인들 중에 있었다. 특별한 지식을 가진 성도들이 우상을 무시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담대히 먹게 되면, 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진 믿음이 약한 자들도 음식을 먹게 되면 그들의 양심에 죄를 짓게 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하여 음식 먹는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는 말이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만약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고 한다.
바로 이 원리가 성도가 담배를 피울 수 있느냐의 문제와 연결이 된다. 성경은 담배 자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지만, 성경이 성도의 양심에 죄를 짓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금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공동체 대부분은 성도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만약 중직자가 담배를 피우게 된다면 신앙이 약한 성도로 하여금 양심에 죄를 짓게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내 양심에 꺼리지 않는 것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 말씀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다섯째, 마음의 평안은 응답의 신호이다.
영적인 체험이 많은 성도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은 기도할 때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신호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롬 14:17). 나의 모든 뜻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면 당연히 우리의 생각은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두려움과 불안한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가르친다. 뭔가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마음속에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함이 있다면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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