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성령충만은 영성의 핵심이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8:4-17).
 
과거에 너무나 힘들게 하던 일을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손쉽게 일한다. 전에는 수동식 톱으로 나무를 잘랐는데, 나무 몇 개를 자르고 나면 팔에 알이 배길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톱을 사용하면 아주 손쉽게 나무를 자를 수 있다. 전에는 수동식 드라이버로 나사못을 박으면, 힘이 많이 들었다. 힘들여 나사못 여남은 개를 박고 나면 온 팔이 욱신거린다. 지금은 전기드라이버의 발명으로 아주 손쉽게 나사못을 박을 수 있다. 전기톱, 전기드라이버를 사용하는 시대는 수동식 톱과 수동식 드라이버를 사용하던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이다. 작업 효율 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전기톱, 전기드라이버는 하루 종일 사용해도 별로 힘이 안 든다.
영적인 면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옛날 수동식 톱이나 드라이버를 사용하듯이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힘들게 신앙생활을 한다. 작은 일에도 몹시 힘들어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전기톱이나 전기드라이버를 사용하듯이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기쁨으로 감당한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사도행전 8:4-17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도 활력이 넘치고 은혜가 충만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일까? 우리보다 신앙생활하기가 쉬워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들은 핍박과 때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은혜가 넘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궁금함을 느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배움의 열정이 있었다. 서로 간에 뜨거운 교제가 있었다. 떡을 떼는 아름다운 친교가 있었다.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을 쏟는 기도의 열정이 있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하루에 3천명, 5천명으로 늘어나는 폭발적인 역사가 있었다. 이런 초대교회의 비밀이 무엇일까? 나는 성경을 읽던 중에 어느 날 그 비밀을 깨달았다.
초대교회와 현대교회를 비교해보면, 영적인 체험에 있어서 분명하게 한 가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영적인 체험의 차이가 분명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할 때가 많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다음 차원의 영적인 경험을 사모하였다. 그 다음 단계를 경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그 다음 단계의 신앙의 진면모를 성경을 통해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사도행전 8:4-17의 배경은 이렇다. 사도행전 7장에는 예루살렘교회의 핍박으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내용이 나온다. 스데반의 순교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 땅을 향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성도들은 그냥 피신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스데반의 순교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 세계를 향하여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필립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시작했다. 빌립이 말씀을 전하자,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굉장한 표적들이 따랐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수많은 남녀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큰 마술을 행하던 시몬이라는 사람도 빌립의 능력에 압도되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다. 빌립의 사마리아 지역 복음전파로 굉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만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으면 복음전파에 성공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 보낸다. 이들은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새로 믿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집회를 갖는다. 이 집회는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 열린 집회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집회를 통해서 사마리아 교인들이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경험하길 원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름 아닌, 성령세례를 받도록 집회를 하고 있다.
예수 믿으면 되었지, 왜 이들이 성령세례 받도록 집회를 했을까? 16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 믿고 세례 받으면 되었지 뭐가 또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에 보면 초대교회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건과 별도로 또 다른 한 사건을 기대하고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마리아 교인들에게도 성령이 내리시길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성령세례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이 성령세례 받도록 특별집회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성령을 받도록 안수기도를 하기 시작하자, 곧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된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개혁주의신학에서 가르친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고전 12:3). 우리의 마음 문을 여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런데 왜 또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지만,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예수 믿는 사건과는 별도로 성령세례(충만)를 받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성령세례를 받음으로써 능력 있는 신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능력 있는 성도가 된 비결이다(1:8). (“성령세례성령충만이라는 용어 사용 문제는 뒤에서 다루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삼 년간 훈련시킨 다음에 바로 제자로 파송한 것이 아니다. 복음전파처럼 긴급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바로 내보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했다. 너희는 위로부터 권능을 입힐 때가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부탁했다(24:49).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120문도와 함께 전심으로 기도하였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10일 후인 오순절이 이르자 이들에게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2:1-4). 성령님께서 위로부터 이들에게 임하시기 시작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 그러자 이들은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가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은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모여 있다가, 각각 자기 나라의 방언으로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들의 혀가 꼬부라져서 하는 말들이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들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이상해진 것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정말 이들은 술 취한 사람들처럼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혔다.
오순절 이후에 사도들도 모두 달라졌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모두 함께 죽겠다고 장담하였다가 주님께서 잡히시자 모두 도망가 버린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목숨을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권능이 충만한 제자들로 바뀌었다.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역사는 단 한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제자들을 포함한 120명의 신자들을 완전히 새로운 능력의 종들로 변화시켜놓았다. 그 이후 초대교회는 반복되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안디옥과 저 이방 땅을 향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는 모두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동정녀 탄생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기적들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 말씀으로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 등 모두 인간의 이성의 이해를 넘는 사건들이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주님의 재림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의 미래의 부활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가? 이런 기적들은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가 없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통해서 그리고 예언된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우리가 믿고 있다. 우리는 이들 역사적인 증거들을 성경을 통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게 된 것이다.
성령세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 것은 믿는 사건과는 별도로 성령세례(충만)의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믿는 자는 성령세례(충만)의 사건을 경험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시점은 성령세례를 체험하면서부터였다. 오늘날 힘 빠진 현대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초대교회가 경험한 성령세례(충만)의 사건이다. 현대 교인들이 성령세례를 경험하면 분명히 달라지리라 확신한다. 마치 수동식 톱을 쓰다가 전기톱을 쓰는 것 같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우리 주위에서도 성령세례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가끔씩 듣게 된다. 성령세례를 경험했느냐, 안 했느냐는 그들의 삶의 능력을 보면 안다. 성령세례의 체험은 마치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내가 유학생 시절에 병원에서 결핵 피부반응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팔에 주사를 놓아주었는데, 붉은 반점이 커지더니 주사 맞은 자리가 보기 흉한 상처처럼 변했다. 결과는 양성반응이었다. 나의 몸속에 결핵균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엑스레이를 찍으라고 해서 찍었더니 폐가 깨끗했다. 결핵이 안 걸렸다는 말이다. 미국 의사는 약을 수개월 동안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했다. 그런데 나는 약을 안 먹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 결핵 보균자가 된 줄 알기 때문이다. 과거에 결핵에 걸렸거나 결핵 예방주사를 맞은 사람은 평생 양성반응이 나온다는 사실은 의학상식이다. 내 나이에 한국에서 자란 사람은 어릴 때 결핵 예방주사를 맞았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린 시절에 주사를 맞았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결핵균을 안다. 그래서 결핵에 대한 면역성을 갖고 있다. 결핵균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몸이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령세례를 경험하는 것도 이와 같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마귀와 대항해서 성공적으로 싸울 수 있는 영적 무기를 갖고 있다. 내가 성령세례를 받으면서 함께 받은 것이 방언 은사이다. 그런데 평시에는 방언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방언은 언제 사용하는가 하면, 영적으로 위협을 느낄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때로는 자다가도 영적인 위협을 느끼면 방언으로 기도가 튀어나온다. 어느 날 어머님이 낮잠을 주무시는데, 주무시면서 꿈결에 방언을 하고 하셨다. 꿈속에서 방언으로 사단을 물리쳤다. 성령세례는 결정적인 때에 우리에게 권능으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세례를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능력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다.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마치 예방 주사를 맞으면 몸이 균을 알고 대항할 수 있듯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사단과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강하게 된다. (그렇다고 과거 어느 교단에서 가르쳤듯이 방언을 해야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은 다 방언하겠느냐?’라고 반문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대학 재학 시에 구원의 확신조차 분명치 않았다. 성령충만을 체험하면서 확신을 얻게 되었다. 1985113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충만을 체험했다. 온 몸이 전기로 감전된 것 같은 큰 떨림이 있었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하기를 시작하였다. 그 이후에 한 가지 분명한 성령 충만의 증거가 나타났다. 복음 전파의 능력이 나타났다. 전에는 학생들에게 전도를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한 사람도 전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체험한 이후에는 말씀을 나누면 십중팔구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받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천상에 올라간 것 같은 큰 기쁨을 체험하였다. 그때 성경이 말하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성령 충만을 체험한 이후에 지적으로도 하나님께서 크게 은혜를 내려주셨다. 본래 영어를 제대로 못해서 고등학교를 그만 두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서울에 가서 학원에 좀 다녀보면 좋을까 해서 학교를 그만 두고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서 둬 달 학원에 다녔다. 그런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돈도 없고 해서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다. 영어의 핸디캡 때문에 대학을 진학하는데도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체험한 이후에 앞으로 유학을 가고자 하는 비전이 생겼다. 사실 영어실력도 그렇고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꿈도 못 꿀 유학의 비전을 갖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꿈이 이루어진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나에게 영어실력이 관건이었다. 그래서 영어실력을 주시도록 기도를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영어를 잘 할 수 있도록 놀라운 지혜를 주셨다. 단어 실력이 탁월한 친구를 붙여주셔서 단어외우는 비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독해력 잘하는 친구를 붙여주셔서, 독해력을 늘이는 비법을 깨닫게 해 주셨고, 카츄사 출신 친구를 붙여주셔서 당시 미군 TV방송이었던 AFKN을 청취하게 되었고, 말을 잘하는 방법도 깨닫게 해 주셨다. 영작문을 잘 하는 책도 알게 되어서, 영어의 4가지 영역(읽고 쓰고 말하고 듣기)을 골고루 실력을 늘리도록 도와주셨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니까, 대학 3학년에는 대학연례 토플경시대회에 만점 득점으로 1등을 하게 해 주셨다. 영어 낙제생이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성과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시험 발표 전날 입상할 것을 꿈에 보여주셨다. 내가 조정경기 선수가 되어서 시합을 하는데, 출발할 때는 거의 꼴찌였는데 내가 탄 배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 나중에 1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 입상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대학 4학년에는 미국 ETS주관 토플시험에서 전세계 상위 1%내에 드는 성적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유학의 길도 열리게 되었다.
나는 성령충만 체험을 통해서 성령님은 영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덕성과 지성과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두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날마다 성령충만이다. 거듭난 인생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사실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의 이해와 우리의 보편적인 이해와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단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받은 다음에 반드시 성령충만을 체험하였다. 성령충만 체험을 통하여 이들은 완전히 다른 교인들이 되었다. 능력 있는 교인들이 되었다. 땅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인이 되었다. 사도행전 1:8의 말씀처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이 삶 가운데 나타나는 삶을 살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 체험으로 권능을 가진 교인들이 되었다. 성령 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능력 있는 증인들로 만들었다. 사도행전 전체를 연구해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믿은 다음에 반드시 성령 충만을 체험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2:1-4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마가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듭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본 사람들이다. 그 중에 베드로를 보면 그는 이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16:16)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다. 베드로는 믿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또 다른 권능의 역사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셨다(1:4). 성령님이 임하시자 마가 다락방에 있던 모든 이들은 변화된 능력의 종들이 되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사건과 별도로 성령충만의 사건이 이들에게 필요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순절이라는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historia salutis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 대속적 죽음, 부활, 승천, 성령 강림으로 연결되는 구원역사의 중요한 단회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오순절 사건의 본질적인 면을 볼 때에 이미 믿는 자들에게 성령세례가 계속적으로 임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오순절 사건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5)고 예언한 말씀이다.
여기서 먼저 용어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성령충만인가 성령세례인가? 장로교회와 순복음교회가 이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데이터를 보면 용어 갖고 논쟁할 할 필요가 없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혼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1:5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는 약속을 사도행전 2:4에는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여기에 사용된 세례라는 말과 충만이라는 용어는 모두 은유적 표현이다. 모두 믿은 이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설명하는 은유적 표현을 갖고 용어 싸움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이 밝히 보여주듯이 믿은 후에 성령님의 권능을 체험했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사도행전에서처럼 용어를 호환해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는 거듭날 때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와는 구분해야 한다(고전 12:3; 3:5-7).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함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 믿을 때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의 차원을 넘어 성령충만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체험하자는 뜻이다.
 
사도행전 4:31 (재차 성령충만 체험)
 
여기에 기록된 사건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다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잡혀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받고 풀려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다시금 모여서 기도하자 성령님이 재차 충만하게 임하셨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대부분 이미 믿는 자들이요, 이들 중에 상당수는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경험한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 위에 성령충만의 역사가 다시금 나타난 점이다. 그리하여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 모두가성령충만을 재차 경험하게 되었다. 이들이 성령님으로 충만해지자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서도 동일한 경험이다. 이들은 이미 믿는 자들이다. 믿는 자들이었지만 성령님으로 다시금 충만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8:4-17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세례)
 
사마리아 교인들은 빌립의 전도로 믿고 세례까지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러자 이들에게 성령충만(세례)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의 대부흥이 시작되었다.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반복하지 않겠다.
 
사도행전 10:34-48 (믿으면서 동시에 성령세례를 체험한 곳)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초청을 받아가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의 핵심을 전하였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갑자기 성령을 받고 방언하기를 시작하였다. 이들에게는 믿음의 사건과 성령세례의 사건이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사건들 중에서 이곳만이 유일하게 믿는 사건과 성령세례가 동시에 일어난 곳이다. 여기에서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사건과 함께 성령충만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넬료의 집에서 나타난 현상은 단순히 믿을 때 나타나는 성령님의 임재와는 다른 모습이다. 베드로가 이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방언을 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물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나중에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에서 해명을 했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8에 말씀하셨듯이 거듭날 때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는 바람이 불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대부분 외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는 보편적인 신자들의 경험이다. 믿을 때에 특별한 외적인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세례(충만)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 외적인 증거들(방언, 예언, 말씀 전파 등)이 나타났고, 이로 말미암아 이들이 성령세례 받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2, 4, 8, 10, 19장의 공통된 증언임).
 
사도행전 19:1-7 (에베소교회의 성령세례 사건)
 
바울이 에베소에서 약 12명의 교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능력이 없는 신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빠진 것을 영적으로 알아채고 이렇게 질문을 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 ‘믿는 사건과 별도로 성령을 받는 역사가 있었느냐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이들은 말했다. 이들은 단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어 바울은 이들이 성령 받도록 안수기도를 하자 이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에베소의 대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힘없고 나약한 여남은 명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구들로 변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때였다. 이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있던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이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세례의 지식이나 세례의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히 "제자들"(1; 이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이다)이라고 불린 자들이었고 주를 믿었던(2; "너희가 믿을 때에") 자들이었다. 이런 칭호는 믿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은 용어들이다. 이들은 믿는 자들이었지만 성령세례의 능력을 모르던 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한 것처럼 이들에게 성령세례를 위한 안수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믿는 사건과 별도의 사건인 성령세례의 사건을 이들이 경험토록 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에 성령충만을 경험한 중요한 부분을 다 찾아보았다. 주목할 점은 초대교회 시대에는 믿은 사건과 별도로 반드시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는 성령충만의 역사가 꼭 있었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의 능력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초대교회가 유무상통하고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고 능력 있는 증인된 비밀이 여기에 있다.
필자는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성령충만의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다.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의 비밀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충만 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구가 될 수가 있다. 성령의 권능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능력 있는 그릇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성령의 능력은 완전히 충전된 배터리와 같다. 옛날 자동차는 때로 헤드라이트를 잊어버리고 끄지 않으면 배터리 파워가 다 방출되어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항상 배터리가 충만하게 충전되어 있어야 시동이 잘 걸린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우리는 성도다운 구실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미움, 증오심, 시기, 질투, 부정한 언어, 부정한 생각 등으로 우리의 영성은 나도 모르게 바닥이 나 있을 때가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의 능력 있는 도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없다. 이럴 때마다 다시금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기도하고, 금식하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으로 충만 받아야 한다. 그래야 완전히 충전된 자동차 배터리처럼 삶의 활력을 주는 엔진을 걸 수가 있다. 그리고 인생의 험난한 코스를 힘차게 달릴 수 있다. 왜 나약하고 힘 빠진 크리스천이 되는가? 십중팔구 세상 속에 살면서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기적으로 성령충만을 위한 기회가 꼭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은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 영적으로 고갈되었을 때는 개인적인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갖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든지, 금식기도를 하든지, 성령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떨어진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은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삶을 개조하는 회개를 하지 않고는 결코 받지 못한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근심되게 한 모든 죄들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죄와는 공존할 수 없는 분이시다. 철저한 회개가 성령충만의 열쇠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가르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 속에 계시는 분이다(14:26; 16:13). 그분을 진정으로 삶의 주인으로 날마다 모시며 그분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이 또한 있어야 한다(14:17).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모두 성령의 역사이다. 권능이 충만한 교인이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20세기에 땅 끝까지 복음전파 운동이 확산된 것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복음이 능력 있게 증거 된 것도 한국 초대교회시기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교회사 속에서 성령충만의 능력을 체험한 몇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다.
 
요한 웨슬리의 회심과 성령충만 체험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23세에 링컨 대학(Linclon College)의 강사로 발탁될 정도로 탁월한 지성인이었다. 그는 복음전파의 열정을 갖고 미국의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사역에는 열매가 없었다. 그는 35세가 될 때까지 복음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인디안들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미국으로 갔노라; 그러나, , 누가 나를 회심시킬 것인가!”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면서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 순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는 1738524일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열린 모라비안 교도의 집회에 참여했다가,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일기에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 있는 모임에 아주 마지못해 갔는데, 거기에서 누군가가 루터(Luther)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아홉시 십오분 전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변화를 묘사하고 있을 때,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정말로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이 나의 죄들, 나의 죄들까지도 없애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요한 웨슬리는 이 사건 이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예수를 믿으면 즉각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됨을 확신하게 되었다.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이후에 요한 웨슬리가 집회를 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그는 훨씬 더 깊은 경험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는 17381015일자 일기에 나는 하나님이 내 영혼에서 모든 약속을 이루시기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그의 열망은 173911일 런던에서 있었던 연말연시의 애찬식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새벽 3시경 우리가 계속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으로 임하셨다. 그 힘이 어찌나 컸던지 많은 사람들이 환희에 넘쳐서 큰 소리로 외쳤고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나님께서 임하신 데 대한 두려움과 놀라움에서 다소 진정되자 곧 우리는 한 목소리로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확신합니다라고 외쳤다.
 
요한 웨슬리가 이 경험을 한 이후에 더욱 큰 설교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때 그는 성령충만을 체험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때부터 요한 웨슬리가 설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울부짖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큰 충격에 쓰러지기도 했다. 그가 설교하는데 갑자가, 한 사람, 또 한 사람, 또 다른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벼락맞은 것처럼 사방에서 쓰러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 웨슬리는 이와 비슷한 수많은 경험들을 기록하고 있다. 로슨은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사실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구원에 대하여 잘못된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은 웨슬리의 명백한 설교로 가면이 찢겨지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을 때까지 커다란 고통에 휩싸였다. 그가 설교하고 있던 어떤 곳에서, 주님이 그분의 팔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엄청나게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큰 소리로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습니까?’” 같은 날 저녁 웨슬리가 설교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영혼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다.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반대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 옆에 쓰러졌다. 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서 있는 동안, 옆에 있던 작은 소년이 같은 모습으로 사로잡혔다. 뒤에 서 있던 청년이 그를 노려보더니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다.”
 
신년 첫날의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후에 요한 웨슬리의 설교에 이런 능력들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감리회 회원들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불과 200년이 지나기도 전에 감리교는 영국과 미국의 주도적인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의 변화의 과정을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거듭난 이후에 성령충만을 체험했던 것과 똑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권능의 도구가 된 것은 거듭남 이후에 성령충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디 엘 무디의 성령충만 체험
 
누구보다 무디 선생을 잘 알았던 사람은 그와 함께 동역했던 R. A. 토레이 박사일 것이다. 그는 무디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7가지 비결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디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었다는 사실을 꼽고 있다. 무디가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게 된 배경을 토레이 박사는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무디는 원래 대단한 정력가였다. 그래서 그는 능력을 받기 전에는 주로 육신적인 힘을 의지하곤 했는데, Y.M.C.A.에 참석하던 감리교도 부인 두 사람이 무디를 위해서 기도했다. 두 부인은 무디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이상한 무디는 왜 저를 위해 기도하시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고요?”라고 했다. 두 부인은 우리는 당신이 권능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무디는 그들의 말하는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다시 물었다. 두 부인은 무디가 성령세례를 받을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디는 이들과 함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계속 성령세례 받기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한다. 멀지 않아 무디는 마침내 성령세례를 체험하게 되었다. 토레이 박사는 그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머지않아 무디가 영국으로 가기로 한 어느 날,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걸어가다가 정신없고 바쁜 도시 한복판에서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 . 즉 길을 가던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는 서둘러 친구 집으로 가서 방에 혼자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 방에서 몇 시간 동안 혼자 있었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의 영혼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그 손을 거두어 달라고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이 너무 커서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런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런던 북부 지방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또한 그 일로 인해 그는 후에 계속해 놀라운 집회들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의 능력을 몰랐던 무디는 두 부인의 기도로 인하여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무디는 능력의 종이 되었다. 무디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깨달은 이후에 토레이 박사에게 자주 성령세례에 대해서 설교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무디 선생은 토레이 박사를 다른 교회의 강사로 추천하면서 꼭 성령세례에 대해서 설교해 줄 것을 요청하곤 했다고 한다. 무디가 육신적인 힘을 의지하던 것을 벗어 던지고 능력의 종이 된 것은 성령세례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성령충만 체험
 
빌리 그레이엄도 그가 사역자로 부름 받은 후에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에 집회 인도하기 위해서 갔다가 스티븐 올포드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첫날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에 참석한 청중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올포드가 몇 달 전에 성령의 역사로 자신이 변화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티븐이 그의 경험을 간증하자, 그를 바라보는 빌리 그레이엄의 눈에는 눈물로 젖었다. 그는 그 은혜를 너무나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며 들었다. 그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도 성령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간절히 매달렸다. 그날 빌리 그레이엄은 성령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기도 후에 "내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도다. . . 나는 얻었도다. 충만하도다."하고 외쳤다. 그날 밤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에는 기적이 일어났다. 빌리의 메시지가 끝날 무렵에 거의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와 헌신을 결단하였다. 그날 밤부터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인중 목사의 성령충만 체험
 
2014년 여름철 백석신학대학원 수련회의 주강사로 온 김인중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의 능력의 비밀을 깨달았다. 그는 625 직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술주정뱅이 도박꾼 아버지 밑에서 정말 어렵게 자랐다. 아버지가 경제적인 부양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생이었던 형이 일찍 결혼을 하여 그의 밑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10살부터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성경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군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한 후에 CCC 모임에 참석했다가 김준곤 목사의 사영리강해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체험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에는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여남은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맡아 몇 개월 만에 67명의 학생들을 모을 정도로 열정적인 전도를 했다.
신대원을 졸업한 이후에 그는 안산에 내려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일년 사이에 150여명의 성도가 모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갈등이 생겼다. 전도해서 사람들은 모였지만 교인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에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목사안수를 받기 전에 40일을 작정하고 철야기도회를 갖기로 결심했다. 바쁜 사역 때문에 피곤한 몸으로 교회에 가서 기도했지만 곧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37일째 되는 날, 그 날도 몹시 피곤하여 사모가 집에서 쉬라고 했지만 자더라도 교회에서 잠을 자리라는 생각으로 교회당으로 향했다. 잠시 기도하고 자려고 생각하고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소리 같은 소리가 귀에 들리면서 방언이 터졌다. 이런 경험이 45분간씩 두 번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첫째, 그에게 말씀의 능력이 임했다. 그 이전에는 여자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이후에는 그의 입에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한다. 말씀을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산동산교회에는 뭔가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많은 병자들이 교회에서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인중 목사가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비결을 그날 깨달았다. 지금도 김인중 목사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혼을 전도해서 주께로 인도하고 있다. 김인중 목사의 설교 중 간증을 들으면서 성령충만의 비밀을 다시금 깨달았다. 거듭남의 은혜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한 순간에 일어나지만, 성령충만(세례)은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이다. 물론 성령충만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충만의 은혜는 김인중 목사처럼 하나님 앞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영혼들에게 채워주신다는 사실이다.
성령충만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순수한 동기로 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점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스티븐 올포드의 간증을 듣고 너무나 사모한 나무지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사모했다. 요한 웨슬리도 올더스게이트에서 거듭남을 체험한 이후에 계속해서 더 큰 은혜를 사모했다. 그렇게 사모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곧 응답하셨다. 무디의 경우에도 성령충만의 능력을 몰랐지만 두 여성도들이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을 때, 그는 곧 그 은혜를 사모하였다. 뉴욕의 길거리를 걸으면서 기도할 정도로 그는 그 은혜를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번화한 길을 걸으면서 기도하던 그에게 임했던 것이다. 성령충만 받기를 원하는가? 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하라. 그리고 작정하고 기도하라. 철야기도든, 금식기도든, 새벽기도든 성령충만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에 반드시 부어주시리라.
요한 웨슬리의 변화, 디 엘 무디의 변화, 빌리 그레이엄의 변화, 김인중 목사의 변화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성령세례를 체험하시라. 성령님은 권능의 영이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1:8). 권능이 있어야 역사가 나타난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아무리 지성을 겸비하고, 아무리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성령님의 권능이 없이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을 받으시라. 항상 성령충만을 사모하라.
 
 
* 적용 질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이후에 성령충만(세례)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아직 성령충만의 체험이 없다면, 김인중 목사처럼 하나님 앞에서 성령충만을 주시도록 특별한 기도의 시간(금식기도, 철야기도, 새벽기도, 골방기도 등)을 가질 용의는 없는가? 결심이 선다면 지금부터 성령충만을 체험할 때까지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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