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적 치유사역자 조이스 마이어 여사가 쓴 『내 마음은 치열한 전쟁터』라는 책에 나오는 사례이다.
메리와 그의 남편 존은 결혼생활이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항상 부부싸움을 했다. 이들은 둘 다 벌컥 화를 내고, 신랄하게 욕을 하며, 자주 폭발했다. 이것 때문에 아이들도 상처를 받고 학업과 행동과 건강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자녀 하나는 신경성 위장 장애를 앓고 있었다. 아내의 문제는 남편을 가장으로 대접하는 법을 모르는데 있었다. 그녀는 가정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했다. 아이들도 자기 마음대로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목소리가 크고, 욕구가 많고, 잔소리가 심했다.
예수 믿으면 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메리는 5년 전부터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문제는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위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분노, 반발, 용서하지 못하는 심정, 원망, 신랄한 태도를 극복하도록 기도를 요청해서 기도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마이어는 그 원인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사단이 “견고한 진들”을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하고 있다. 메리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메리의 아버지는 자신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그 딸을 때리곤 했다. 딸이 뭔가 잘못하면 딸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자기 남동생은 남자라는 이유로 매를 맞지 않았다. 그래서 메리는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남자에 대한 불신, 편견, 혐오감을 되뇌게 되었다. 10년 이상 수만 번 이런 생각을 되뇌게 되자, 이런 생각이 메리의 마음속에 견고한 진으로 구축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결혼생활에 인격적인 장애를 가져왔다.
저자 마이어는 이런 마음의 견고한 진을 부수는 처방을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메리의 경우처럼 마음속에 구축된 견고한 진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다. 깡패, 강도가 예수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메리는 정도가 심한 경우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타락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의 진들이 구축되어 있다. 이런 견고한 진은 우리의 성격의 한 부분이 되어 일생동안 우리를 괴롭힌다. 마이어는 말씀에 근거해서 치유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20은 우리의 옛 사람의 일부가 된 이런 인격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말씀 중에 하나이다.
갈라디아서 2:20은 예수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친다. 본문의 핵심적인 명사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온전히 우리 안에 사는 비결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한글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원문은 '믿음 안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by faith), 혹은 '믿음에 의해서'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 단순히 믿음을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갈라디아서 2:20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살아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 ‘내가’라는 말은 ‘나의 옛 사람’을 의미한다. 나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이미 죽었다는 말이다. 처절히 죽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어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는가를 우리는 잘 안다. 로마 병정들에게 살인용 채찍에 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상까지 힘들게 걸어가셨다. 골고다 산상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혀 신경이 찢겨지고 어그러지는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6시간동안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셨다. 손목을 삐기만 해도 너무나 아픈데, 손목사이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손목의 중추신경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발목에도 못을 박았다. 체중에 늘어져 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횡격막이 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래서 숨을 쉬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과 발목은 끊어지듯 아픔을 느꼈다. 이렇게 6시간 고통을 당하다가 돌아가셨다.
왜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을까? 나의 옛 사람이 이런 처절한 고통가운데 죽었다는 뜻이다. 다른 각도로 생각하면, 나의 자아를 죽이기가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에 비유하고 있다. 나의 자아는 누군가 말한 것처럼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기다. 이제 좀 죽어나 싶어서 보면 아직까지 살아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자아를 죽이는 데는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따른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큰 교회는 남미 콜롬비아에 있다. 세자르 카스텔라노스 목사가 목회하는 MCI교회인데, 성도의 수가 50십만 명이다. 이 교회는 G12제자훈련 사역으로 유명한 교회이다. 카스텔라노스 목사는 골방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역하는 분이다. 그는 부인과 결혼한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했고, MCI교회를 개척한 것도, 셀 사역도, G12모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사모도 남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길 원했다. 그런데 신앙생활한지 21년 만에 그 원리를 터득했다. 칼스텔라노스 목사 사모는 정치학을 공부한 후에 상원의원까지 역임한 분이다. 1994년도 선거에 낙선하면서 자신이 철저히 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간적인 욕심과 야망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철저히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모는 21년간 정치인으로, 여성목회자로, 제자훈련 지도자로 화려한 신앙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자아가 죽는 체험을 한 이후에야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간증했다. 이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던 브니엘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얍복 나루터에서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생각을 죽이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나의 자아,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교만과 고집, 나의 마음속에 구축된 견고한 진이 철저히 깨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단지 우리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돈, 자녀, 건강, 사업 축복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하는가? 이런 것이 앞선 기도는 세속적인 기도이다. 우리는 먼저 나의 자아를 죽이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의미한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드리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위한 기도가 바로 이런 뜻이다. “성령님, 오늘도 나의 자아를 죽여주소서!” 이렇게 날마다 기도해보라. 나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사도바울은 이 원리를 알았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친 것이다.
둘째, 이제 내 안에는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셨다. 오순절에 예수님은 영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셨다. 그리하여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은 영으로 임재해 계신다. 나의 자아가 죽어질 때에,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분의 삶을 살아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실 수가 없다.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활동하실 수가 있겠는가?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실 수가 있다.
뉴욕에서 이민목회를 할 때 경험했던 일이다. 그곳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교회대항 탁구대회가 열렸다. 우리 교인 중에 한국에서 탁구 국가대표선수를 지낸 집사가 있었다. 그분에게 어느 날 탁구코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집사가 나의 손을 잡고 코치를 해주었지만 공은 여전히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 분은 나에게 계속 힘을 빼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의 힘을 완전히 뺏을 때 공은 정확하게 들어갔다. 이를 통해 중요한 영적인 진리를 깨달았다. 나의 힘을 완전히 빼야 코치가 나를 통제할 수 있듯이, ‘나의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 성령님께서 나를 다스릴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을 완전히 내려놔야 성령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
지금은 소천하신 이중표 목사는 한신교회를 목회하신 분인데, “별세신학”이라는 유명한 십자가 신학을 남기고 가셨다. 이분은 복음의 핵심과 제자도의 핵심을 별세신학으로 표현했다. 그는 별세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별세신학은 그리스도를 살리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얼핏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그리스도를 살리겠는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을 살리는 것이 옳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성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살아있는 분이고 오늘도 역사하셔서 우리를 살리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피조물인 우리 안에 살아계시지 않으면 그 그리스도는 죽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자연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사역을 행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리스도가 살아서 역사를 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은 오늘 실존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우리 안에서 현재화되는 일인데 이는 별세의 사건이다. 그리하여 별세의 사건이 일어나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며, 우리는 그의 가치관에 따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게 되고, 그 그리스도적 인격이 우리의 삶으로 발현되며, 이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역사가 나타난다. 별세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좀 더 파고들어가 질문을 하자면, 내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이는 내 몸속에 계신 주님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시면서 사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섬기셨듯이, 나도 섬기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온유 겸손한 성품을 가지셨듯이, 나도 온유 겸손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듯이,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입에 말씀이 살아 움직였듯이, 나의 입술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성령 충만하셨듯이, 나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전도하셨듯이 나도 복음 전하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권능으로 가르치셨듯이 나도 가르침의 능력을 가진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탁월한 인격을 지녔듯이 우리도 탁월한 인격자가 된다는 뜻이다. 주님이 하나님 나라에 비전에 사로잡혀 사셨듯이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사로잡힌 자가 된다는 뜻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면, 예수님 닮은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말대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작은 예수’의 삶을 산다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조롱하겠는가? 주님처럼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될 것이다.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셋째,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 중심으로 산다는 뜻이다.
본문 뒷부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은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과 원수 된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신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 믿음이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은혜에 감격해본 경험이 있는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305장). 찬송가 가사처럼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은혜에 놀라 감격한 적이 있는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만 끄떡이며 믿는 것이 아니다. 이는 머리 신앙이다. 가슴 신앙이 되어야 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뭉클한 감격이 있어야 한다. 내가 사형을 당해 죽어야 할 자리에 누가 대신 죽어 주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 감격이 생기지 않겠는가?
내가 6살 때 있었던 일이다. 동네 6살짜리 친구와 4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연못에 놀러갔다. 초겨울이라 연못에 살얼음이 얼어있었다. 친구가 살얼음판에 올라가 콩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얼음 난간에 서서 손을 뻗쳐서 그를 끌어당겨 내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가 나오지 않고 발밑의 얼음이 꺼지면서 함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때마침 아랫동네에 사는 노인이 산에 땔나무를 줍기 위해서 왔다가 멀리서 보고 소리를 질었다. ‘거기에 빠진 게 개냐 사람이냐?’라고 했다. 동생이 발을 구르면서 우리 형이 빠졌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이 쫓아와서 옷을 입은 채로 들어와 나와 친구를 건져주었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여서 그 노인의 고마움을 잘 몰랐다. 부모님은 그 어른이 너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 노인을 생각할 때 정말 그분은 생명의 은인임을 깊이 깨달았다.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것밖에 없다. 육신의 죽음에서 살려주신 것을 생각해도 감사한데, 영원히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나를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성도의 삶은 주님의 이 사랑에 감격하여 사는 삶이다. 이 사랑에 감격할 때 진정한 섬김도 봉사도 충성도 헌신도 용서도 사랑도 따라오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높아지려고 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을 주님은 어떻게 변화시키셨는가? 십자가 지러 올라갈 때까지 변화되지 않았던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주님의 끊임없는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기 바로 전날까지 자신들의 발까지 씻으면서 섬기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한 모습을 보았다. 여기에 감화를 받았다. 이 사랑에 감동하여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제자들을 더욱 사랑하였다. 요한복음 13:1은 이를 밝히고 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의 변화는 바로 이 사랑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시대의 교부였던 폴리갑은 팔순이 넘은 노년에 순교를 당했다. 로마의 지방 총독이 사형 전에 마지막으로 폴리갑에게 요청했다. 지금이라도 “가이사 황제가 주”라고 고백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폴리갑은 “지난 86년 동안 내가 그리스도를 섬겼는데, 주님은 나에게 한 번도 잘못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어떻게 모독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기꺼이 화형을 선택했다. 일생동안 주님의 큰 사랑에 감동받은 그는 기꺼이 주님을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사도 바울 역시 주님의 이 사랑에 감동을 받은 사람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고 오직 주님만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은 자신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에 감동한 데 있었다. 예수 믿는다는 믿음은 주님이 내속에 살아서 주님의 삶을 살아간다는 믿음위에 사는 것이다. 우리 성도의 모든 삶은 주님 안에서 삶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우리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니 우리는 실패할 자가 아니라 승리할 자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시니,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자이다. 반드시 이길 자이다.
네비게이토의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수레바퀴에 비유했다. 수레바퀴의 축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의미한다. 수레바퀴의 살들은 말씀, 기도, 증거, 교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퀴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바퀴의 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온다. 이는 예수님을 중심에 둔 말씀 묵상, 기도, 증거, 교제만이 의미 있다는 뜻이다. 수레바퀴의 축이 빠진 살들이 무용지물이듯이, 예수님 빠진 종교적 활동은 무의미한 것뿐이다. 예수님 빠진 기도, 예수님 빠진 말씀, 예수님 빠진 전도, 예수님 빠진 교제는 무의미한 종교 활동에 불과하다. 예수님 중심의 삶이 되어야 신앙의 의미가 있다.
오늘날 맨 앞에서 말한 많은 ‘메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옛 사람의 견고한 진을 깨뜨려야 진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나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어질 때, 그리스도가 중심에 오시고 문제가 해결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내가 완전히 죽어야 내 속에 주님이 살아 역사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덜 죽으셨다면 부활이 있을까? 이렇게 되면 부활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덜 죽으면 주님의 부활의 새 생명도 역사하지 않는다. 내가 완전히 죽어지는 곳에 부활의 새 생명이 역사한다(롬 6:3-4). 이때 관념적 신앙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걷게 될 줄 믿는다.
* 적용 질문: 아직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나의 옛사람의 모습은 없는가? 나의 인생에 아직 예수님이 중심이 되지 못하는 곳은 어떤 곳인지 자신을 성찰해보라. 나의 지갑인가, 나의 연구나 학업인가, 나의 가정생활인가, 나의 사업인가? 그곳에 주님을 중심에 모시도록 결단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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