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평가하신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1-3).
 
심각한 병을 앓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청년이었다. 칼슘이 몸 안에서 과다 생성되어 축적됨으로써,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 버리는 무서운 병이라고 한다. 여덟 살에 다리를 절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리에 누워 굳어가는 육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도구가 되고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운 채로 혼자서 영어와 한문을 익혔다. 그리고 역시 누운 채로 한 손에는 볼펜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렇게 하기를 30여 개월, 드디어 원고 800매의 고통의 이야기를 탈고한다. 이렇게 탄생한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놀랍게도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박진석 씨는 SBS 휴먼 드라마에도 소개되었는데,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감동의 휴먼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지독한 고통에 맞서면서 욥의 믿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믿음의 드라마였다. 그는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믿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믿음이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소개한다. 이들을 모두 믿음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아벨도, 에녹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요셉도, 모세도,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들 믿음의 사람들을 평가하기에 앞서서 믿음이란 뭔가?’, 즉 믿음의 실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고 시대적 우려를 나타내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은 믿음이라도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신 말씀이다.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믿음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고 믿음의 영웅들의 믿음을 본받기를 바란다. 히브리서 11장을 중심으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세 가지를 찾아보겠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히브리서 11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실상이란 말은 원어로 휘포스타시스”(u`po,stasij)라는 말인데 이는 본질, 실체, 실상이라는 뜻이다. 믿음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있는 실상과 같다는 뜻이다. 허상을 신기루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신기루는 허상이다. 중국 어느 바다에서 거대한 신기루 현상이 있었다. 바다위에 거대한 도시가 나타나서 네 시간동안 있다가 사라졌다. 이 신기루는 짙은 안개가 주변 작은 섬을 덮기 시작해서 네 시간여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산과 거북, 군함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가 대규모 도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허상들은 눈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신기루 현상은 빛의 굴절현상 때문에 생긴다. 지면이나 수면과 맞닿는 곳에 공기의 온도차가 심할 때 빛이 굴절해서 생긴다고 한다. 신기루 현상은 주로 사막에 많이 나타난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보이는데, 가보면 그곳에 오아시스가 없다. 빛이 굴절되어서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신기루 현상이다.
믿음은 이런 신기루 현상과 같은 허상이 아니다. 믿음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요 실상이다. 집에 책상이 존재하듯이, 컴퓨터가 존재하듯이, 내가 옷을 입고 있듯이, 내 손발이 존재하듯이 확실한 실체와 같은 것이 믿음이다. 히브리서 11장이 가르치는 바는 믿음을 갖고 바라는 것은 이런 실체들처럼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하셨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리라. 네가 밟는 땅을 주리라. 너와 네 후손이 열국의 복의 통로가 되리라고 약속하셨다(12: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모든 약속들을 믿었다. 아브라함이 믿은 대로 이 모든 것은 훗날 실상으로 다 이루어졌다. 출애굽 시에 약 200만이나 되는 큰 민족을 이루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써 약속된 땅을 얻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 모든 민족들이 최고의 복을 받게 되었다. 그는 과연 복의 통로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미래의 우리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이 모든 것들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믿을 때,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실상으로 분명히 다가온다.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에 증거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 엘렝코스”(e;legcoj)증명하는 것”(proof)이라는 뜻이다. 믿음 자체가 우리에게 확실히 증명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걸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과거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직간접적으로 350번이나 예언했다. 약속대로 예수님은 오셨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동정녀를 통해서 오셨다. 약속대로 베들레헴 땅에 오셨다.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 약속대로 우리 죄를 위해 고난 받으셨다. 약속대로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다.
그리고 주님은 약속대로 재림하실 것이다. 약속을 믿는 자는 주님의 재림이란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가진 비전은 언젠가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훈련해서 세상으로 보내면서 땅 끝까지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비전이 성취될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 주님의 꿈은 정말 이루어졌다.
지금 부산에서 전도의 열풍을 일으키는 분이 있다. 손현보 목사란 분인데,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라는 책을 썼다. 다음 이야기는 그의 책에 나온다. 손현보 목사는 수년 전에 부산 가까이에 작은 어촌교회에 부임했다. 교인은 장년 24명이 전부였다. 남전도회 모임에 갔더니 일 년 행사가 개 한 마리 키워서 잡아먹는 것이 일이었다. 사업보고를 하는데, 지금 개가 토실토실 살이 졌다는 보고를 했고 남전도회원들은 박수를 치고 야단이었다. 손 목사가 개 키워서 뭘 하느냐고 질문했다. 이렇게 개 키워서 여름에 부부동반으로 놀러가서 잡아먹는 것이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단다. 손 목사는 이 교회 남전도회는 완전히 개판이구나!”라고 했단다.
이런 목표도 비전도 없는 어촌 교회에 부임해서 부임 첫 설교에 출석교인 100명 전도목표를 발표했다. 교인들이 이는 도저히 불가능이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경 3킬로 내에 주민들 다 합쳐야 300명도 안 된다. 30평도 안 되는 교회에 100명이 어디에 앉느냐? 여건상 불가능하다.”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그 다음에는 300명을 목표로 정하고 전도하자고 했다. 또 반대했다. 3킬로 내 지역주민이 300명인데 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때 목사님에게 허풍쟁이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래도 믿고 기도합시다!” 이렇게 해서 세계로교회는 열심히 전도하여 2004년에 198, 2005년에는 258, 2006년에는 322, 2007년에는 418, 2008년에는 590명을 세례 주었다고 한다. 몇 해 전에 4천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할렐루야!
이 책을 읽으면서 믿음으로 하면 되구나하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세계로교회에 비하면 많은 교회들의 여건은 얼마나 좋은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줄 믿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1:1).
 
둘째,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다.
 
히브리서 112절은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증거라는 말은 1절에 사용된 증거라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여기에 사용된 말은 증인이 되다혹은 증언하다라는 뜻을 가진 마르투레오”(marture,w)라는 말인데, 이의 과거 수동형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영역본 RSV도 같은 뜻으로 번역함).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영웅들은 이들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인물들을 믿음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한다. 히브리서11장은 신앙의 위인들 모두를 믿음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본장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믿음으로라는 말이다. 신앙 위인들이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평가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다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다고.
 
이렇게 모든 신앙 위인을 믿음의 관점에 평가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길 바란다.
 
셋째, 믿음은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는 유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무로부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1:6).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9).
 
천지창조의 기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보게 된다. 말씀하신대로 모든 피조물들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 우리의 죄성을 뿌리 뽑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민수기 21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죽었다. 이때 백성들은 모세에게 찾아와서 요청한다. 기도해서 뱀들을 떠나게 해달라고.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낫도록 하셨다.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위에 높이 매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뱀에게 물린 자가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나음을 받았다(21:9).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의 치유방법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다. 장대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나았을까, 안 나았을까? 물어보나 마나이다. “그것 쳐다본다고 뭘 났느냐라고 생각하고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믿음이란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이 놋뱀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장대위에 달린 놋뱀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쳐다본 사람이 나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도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든지 믿음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 믿음은 이렇게 단순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씻은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왜 이런 효력이 나타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할렐루야!
신앙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곧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신앙인이 되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구약시대의 모든 신앙의 선열들을 평가할 때 성경은 한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평가한다. 바로 믿음이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사사들도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인격적인 요소 중에 하나는 누가 뭐래도 믿음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다른 모든 좋은 영적인 능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다면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영성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
 
* 적용 질문: 나는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성찰해보자. 믿음이 흔들린다면 무엇이 나의 믿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요소인가 면밀하게 자신을 성찰해보고, 확고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점검해보자. 예를 들면, 현대 과학의 영향으로 성경에 대해 의심이 생기지는 않는가? 아니면 성경을 읽지 않아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는가

하나님 사랑은 신앙의 척도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당시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사회에서 굉장히 존경받는 경건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했다. 그들은 작은 수입이라도 철저히 십일조를 드렸다. 그들은 자주 금식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신랄하게 위선자들이라고 비판을 받았는가? 그들의 종교생활에 있어서 뭔가 근본이 심각하게 잘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신앙생활의 외적인면만 보시고 비판을 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안식일 준수나 십일조나 금식이나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는 신앙인으로서 경건에 유익한 것들이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5:4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여호와 신앙의 본질인 사랑이 빠진 것을 보셨다.
하나님 사랑이 빠진 신앙생활은 종교적 열정이라는 숫자에 0을 곱하는 것과 같다. 종교적 열정이 1이든, 10이든, 100이든, 1만이든, 100만이든 아무리 열정의 강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이 0인 사람에게는 그 모든 종교적 열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0으로 처리된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주일성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일성수는 단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이다. 주일이니까 형식적으로 교회에 가고, 직분자이니까 체면상 교회에 가고,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십일조는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는 직분의 체면상 드리거나 아니면 복 받기 위해서 드리는 기복적인것일 뿐이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금식이나 기도는 무슨 영적인 도움이 되겠는가? 그 금식이나 기도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달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지 않으시는데, 그 기도나 금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은 신앙의 근본동기요 토대요 근원과 같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영성에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 사랑 없는 영성은 모래성 쌓기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성을 높이 쌓는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신앙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어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22:37-40).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을 영성에 두는 이유는 이는 우리의 영성의 근본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 이웃 사랑은 대인관계의 덕성의 차원에서 분리해서 다루기로 하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신앙의 본질을 바로 가르쳐주셨다. 신명기 64-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본질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본문은 쉐마(Shema)라고 불리는데, 학자들은 이를 이스라엘 종교의 근본적인 진리라고 칭한다. 이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하나님의 한 분되심”(4)과 둘째 그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무인 하나님 사랑”(5)이다. 정통유대교인들은 가죽으로 만든 사각형 경문박스에 쉐마의 말씀을 비롯한 4가지 성경구절을 넣어 왼팔과 머리에 차고 주중 아침기도 시간에 기도한다.
신명기 64절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고, 5절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4)라는 말씀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원 무한히 완전하신 분이고, 자존하시며, 자족하신하나님이시고, 그분만이 오직 유일하신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매튜 헨리는 이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앙은 많은 다신 우상들의 유혹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무장시킬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5절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데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의 반응으로 신명기에 자주 부각된다. 그 감사는 깊고도 전심을 다한 헌신으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명기 10:12-13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이 말씀은 쉐마가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설명한다. 하나님 사랑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그분의 명령과 규례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신명기 65절에 사용된 수식어를 하나씩 검토해보자. “마음을 다하고라는 말에 나오는 마음이란 히브리어 레바브는 영어에서 주로 heart로 번역이 된다. 영어의 heart 혹은 mind라는 말을 번역할 때 국어로 마음이라고 주로 번역한다. 그런데 더욱 정확히 번역하면 heart‘(마음의) 중심을 의미하고 mind는 그냥 마음이란 뜻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마음을 다하고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뜻을 다하고에 나오는 의 히브리어 원문은 네페쉬라는 말인데, 이는 주로 생명이나 생명력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뜻을 하다고라는 번역보다 바른 성경이 번역하고 있듯이 목숨을 다하고라는 번역이 더 낳을 듯싶다.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원문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나 자원까지 포함하는자신의 총체적인 능력을 다한 하나님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맥콘빌은 하나님 사랑에 수반된 수식어들이 전체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한 목적을 지닌 완전한 헌신”(a devotion that is single-minded and complete)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한 목적을 지닌 완전한 헌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답은 이미 앞에서 주어졌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되 그의 계명을 전심을 다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계명 순종은 하나님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의 말에 순종하지 않겠는가? 만약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말에 순종하지 않겠는가?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있다. 하나님 아버지도 아들 예수님도 성도들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님도 자신을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맥락 속에서 계명은 일차적으로 사랑의 새계명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의 계명”(14:15, 21)이라고 말씀하실 때, “계명은 단수형이 아니라 목적격 복수형(엔톨라스)으로 되어 있어 새계명만으로 좁게 볼 수 없다. 주님은 나의 계명나의 말들로 상호교환하면서 사용하신다. 이는 주님이 가르친 말씀들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계명 순종은 더 넓게는 십계명의 순종도 또한 포함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십계명 첫 네 가지의 순종은 곧 하나님 사랑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십계명 제1,2계명 순종).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3-6).
 
첫 계명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 계명을 하나님을 섬기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지 말라는 말이다. 둘째 계명 위반의 대표적인 실례가 아론이 광야에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여호와라고 섬긴 사건이다. 이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섬기지 말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우상들은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우상들이 아니라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곳에 세워진 마음의 우상들, 즉 탐심들일 것이다(3:5).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신앙의 가장 큰 위협이 있다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각가지 탐심이 만들어 놓은 우상숭배가 아닐까? 예수님도 이 사실을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못 박아 가르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사랑의 차이라는 점을 주님은 분명히 하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상이 될 수 있다. 돈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앞서면 돈이 우상이다. 권력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앞서면 권력이 우상이다. 명예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앞서면 명예가 우상이다. 쾌락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앞서면 괘락이 우상이다. 자녀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앞서면 자녀가 우상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보다 앞선 것은 우상들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어지럽히는 사건들은 대부분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서 오는 문제들이 아닐까? 왜 돈 때문에 고소를 당하고 투옥되고 하는가? 결국 돈이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 교회세습으로 교회의 이미지를 계속 실추시키고 있는가?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심과 물질에 대한 탐심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성추행을 하는가? 쾌락에 대한 탐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 표절과 대필을 하는가? 헛된 명예에 대한 탐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20:7).
 
예수님은 주기도문(6:9-13)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첫 3가지를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 할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가르치셨다(9-10). 우리의 기도 중에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 먼저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긴급하게 요청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에 대한 3가지의 기도제목 중에서 첫 번째 나오는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를 가르쳤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 주님의 첫 번째 관심이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 받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중요하고 우리의 삶에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십계명 제3계명은 먼저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명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영어에는 “Oh, my God!”(맙소사!)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혹시 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자녀나 친척들이 이런 말을 남발하면 반드시 고쳐주어야 한다. "Oh, my goodness!" 혹은 "Oh, my gosh!"라고 쓰게 해야 한다. 원래 “Oh, my God!”이나 “Jesus!”라는 표현은 어려울 때 하나님이나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말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이런 말들이 많은 경우에 욕으로 사용된다. Jesus라는 말은 제기랄!”이라는 욕으로 사용된다. 성도들은 이런 말을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들이다.
가끔 페이스북에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농담을 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가 농담에 섞어서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한다면 아버지 이름을 농담에 섞어서 사용하겠는가? 옛날에는 아버지 이름을 누가 물으면 대답할 때 그냥 달아서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 함자(銜字)자입니다.”라고 말해야 예절 바르게 생각했다. 육신의 아버지 이름도 이렇게 귀하게 생각한다면 육신의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농담에 섞어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십계명 제3계명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만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사회에서 죄를 범하여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면 모두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과 같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범법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에 심각한 먹칠을 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모독하게 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가리켜 개독교라고 칭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에 심각한 오명을 씌운 시대가 되었다. 오 주여, 우리의 죄악을 불쌍히 여기소서!
 
셋째, 모든 신앙적인 활동도 하나님 사랑의 동기에서 행하자(4계명).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8-11).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안식일 개념은 주일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제4계명은 구약시대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을 기념하여 지킨다. 지금도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2:16).
 
이 말씀에 따르면 구약시대의 음식법(“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들과 초하루 등이 구약시대의 의식법에 해당하듯이 안식일 준수도 구약시대의 의식법에 속한 것임을 밝힌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주일을 지키되 구약시대 안식일이 갖는 근본적인 정신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되겠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제7일에 쉬시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세상일로부터 쉼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창조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과 맥이 통한다(2:27). 옛날 노예사회에서 안식일은 노예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쉼의 날이 되겠는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안식일이 없었다면 노예들은 얼마나 혹사를 당했겠는가? 가축들에게도 안식일의 쉼은 얼마나 건강유지와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무엇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민들로 하여금 과로하지 않도록 막아주었고, 심지어 땅도 7년마다 찾아오는 안식년을 통해서 기운이 소진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특히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에는 땅의 쉼과 함께 빚의 탕감, 잃어버린 땅의 회복과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이었다. 안식일의 쉼의 정신은 신약시대 이후에 주일성수의 기본적인 정신으로 남아있다. 주일에는 세상일을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거룩히 지키는 것이 신약시대 이후에 기독교에서 주일을 지키는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가장 큰 충돌을 빚은 것은 안식일 준수의 문제였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12:1-14; 6:1-11). 왜 이런 충돌이 빚어졌을까?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어 놓고 안식일 제정의 근본정신은 잊은 채 율법주의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 그들은 안식일 준수가 마치 자신들에게 의를 이루는 것처럼 여겼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 율법을 어긴 것으로 여겨 정죄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치는 모습을 보고 율법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붙였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난에 대해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상기시키면서 설명했다. 안식일에 마귀에게 눌린 자, 질병에 눌린 자를 고쳐 참 안식을 주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정신임을 강조하셨다. 구덩이에 양이 빠지면 안식일에 건져내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단의 함정에 빠져 고난을 당하고 있는 병자들을 안식일에 고치는 일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성수를 할 때 조심해야할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이다. 옛날 어느 교단에서 주일에 교회 가는데 버스조차 타지 못하게 했다. 지금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안다. 정말 교회에 갈 때 버스조차 타지 않는 것인 진정한 안식일 준수의 정신이겠는가? 오히려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갈 때, 육신이 쉼을 얻어 예배 시간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버스를 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주일성수를 너무 기계적으로 율법주의적인 방식으로 준수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올바르겠는가? 그 근본정신은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들의 쉼을 위해서 안식일을 주셨듯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일을 지킨다면 올바른 주일성수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날을 구분하여 세상일을 쉬면서 주님 앞에 예배하는 날로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주일성수 뿐만 아니라 십일조나 헌금을 드리는 일이나 교회나 세상에서 봉사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면 결코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도 철저하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은 것은 율법의 더욱 근본적인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린데 있다(23:23). 바리새인들이 그렇게도 꼼꼼하게 작은 채소의 일부라도 십일조를 드리면서 주님의 책망을 받은 것은 그들의 근본 마음의 동기에서 하나님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과 같은 여호와 신앙의 핵심가치들을 뒷전에 두고 사소한 것에 매일 수 있었겠는가? 십일조를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이들이 가진 문제는 안식일을 그렇게 꼼꼼하게 지키면서도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린 것과 똑같은 문제들이다.
이들의 과오를 우리를 거울로 삼아야 우리도 이들이 빠진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신앙생활의 오류를 방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성수, 십일조나 헌금, 봉사, 기도나 금식 등 모든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동기가 오직 하나님 사랑에 위에 세워질 때 우리의 신앙은 결코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웃 사랑의 계명 순종은 하나님 사랑과 관계가 없는가? 아니 다른 계명 순종은 하나님 사랑과 관계가 없는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계명 순종은 하나님 사랑과 관계가 있다. 이는 이미 앞에서 말씀을 통해서 확인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직접 하나님과 관계된 십계명 제1-4계명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이웃 사랑의 계명 순종은 덕성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님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성경은 아가페 사랑의 출발점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은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애굽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종살이 하던 그들을 건저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도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2). 그래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라고 명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요한일서 410절에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의 뜻은 이렇다. 영역성경 NIV를 보면 화목제란 말을 속죄를 위한 제물’(atoning sacrific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사랑과도 질적으로 다른 사랑이다. 하나님께 반란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외아들의 생명을 내어놓는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 세상에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다. 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상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도 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개죽음처럼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고한 아가페의 사랑이다.
 
몇 년 전 헐리우드의 유명한 영화배우인 멜 깁슨이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이라는 영화를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만을 다룬 영화이다. 멜 깁슨은 2004년도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투자하기를 꺼렸다. 지금까지 '벤허''십계' 이후에 흥행에 성공한 기독교 영화가 없었고,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수난만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없었다고 한다. 멜 깁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영화를 제작했는데, 헐리우드에서는 공공연하게 이제 멜 깁슨은 끝났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를 개봉하는 첫날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멜 깁슨은 첫날 투자한 돈을 모두 벌어들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영화를 보고 강도가 자수하고, 가출한 자녀들이 가정으로 돌아오고, 영화관은 부흥회의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였다.
이슬람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이 이 영화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영화를 상영했는데, 예상의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많은 회교도들이 이 영화를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로 인해 이틀 만에 영화 상영을 중단했다고 한다.
영화 시사회에서 한 유대인 기자가 멜 깁슨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정말 우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생각하시오?" 멜 깁슨은 "아니요, 나는 예전에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영화는 나를 사랑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멜 깁슨이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를 만든 것은 유대인을 미워해서 아니다. 유대인들은 멜 깁슨의 의도를 오해했지만 그가 영화를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자신을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에 감동해서, 이를 그리기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만든 신앙고백적인 영화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다. 우리의 마음이 메말라 갈 때마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기억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끊임없이 기억할 때, 우리의 영성은 결코 메마르지 않을 줄 믿는다.
 
* 적용 질문: 나의 삶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지 자신을 성찰해보자(권력, 명예, , 쾌락 등). 나의 언어나 삶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적이 없는지 성찰해보자. 그리고 나의 신앙생활의 동기는 항상 하나님 사랑인가 자신을 점검해보자. 혹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고치자. 그리고 날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도록 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