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7일 월요일

[뉴스앤조이 기고글] 삶으로 드리는 살아 있는 예배

오늘날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삶의 문제가 아닐까? 도덕성은 곧 우리의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 생활, 말씀 묵상, 성령 충만한 삶, 전도와 제자 훈련, 예배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런 영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행위 문제라고 하면 누가 온전하다고 하겠는가? 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도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그들보다 낫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들보다 떨어질 때가 많다. 우리의 행위가 그들보다 떨어질 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신뢰하지 않게 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도 결국 행위가 문제가 되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
이사야 1장 11-13절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렇다.
이런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제물을 바쳤다.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들을 열심히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열심히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 등 모든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나님께 부담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14절). 너희가 드리는 예배와 헌물이 내가 지기에 너무나 힘들다. 그러니 그만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드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긴다고 하신다. '가증스러운 것'(토에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자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이다(레 18:22; 20:13; 신 7:26). 무엇이 이들의 종교 생활을 하나님께 무거운 짐,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나님은 이들에게 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손을 펴서 도움을 요청해도 눈을 가리고 응답하지 않겠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5절)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기도에 대해 전혀 응답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귀를 닫아 버리는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예배 행위를 지긋지긋하게 여기시는지 그 이유를 중간중간 말씀하신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곧 행위의 문제였다. '악한 행실'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악행 대신 선행과 정의를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정의란 17절에 나오듯이 사회적인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힘없는 자들의 소송을 공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예루살렘은 한때 정의와 공의의 도성이었으나 이 당시에는 악을 행하는 살인자들이 우글거리는 도성이 되었고, 예루살렘 권력자들은 도둑들이었고 뇌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소송이 공정하게 행해지지 않았다(21절). 이들의 행위가 바로 문제였다.
잘못된 행위는 우리의 종교 생활 자체를 무효화한다는 사실을 이사야 1장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제물과 절기 준수가 의미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부패한 상태에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예배도 하나님께 무거운 짐만 지워 드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일부 종교개혁 후예들의 오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행위구원론을 깨뜨리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개신교에서는 귀가 따갑도록 가르친다. 이를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오해한다. 이런 오해에 큰 함정이 숨어 있다.
이런 오해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루터가 종교개혁 할 당시에도 나타났던 문제이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이런 오해가 오늘날 구원파 이단이 갖고 있는 구원관과 일치하는 견해이다. 루터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중에 깨닫고 성도의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여전히 루터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종종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니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언제라도 이런 오해에 빠지기 쉽다.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항상 야고보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는 항상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롬 3:20-22, 28; 갈 2:16; 3:2, 5). 많은 본문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롬 3:27; 9:32; 11:6).
바울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점이다. 이것이 이들의 함정이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이들의 문제점이었다.1) 이들은 십계명을 주신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를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성경은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한다(요일 3:15).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연 십계명을 이런 관점에서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십계명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제2, 3의 용도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십계명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십자가로 달려가 죄 용서 받도록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주신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이들에게 필요 없게 된다.
이와 똑같은 함정에 빠졌던 종교가 중세의 가톨릭이었다. 이들은 믿음 외에 행위도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위가 온전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에 답을 할 수 없다. 이 고민이 중세의 루터가 했던 고민이다. 자신의 행위를 생각할 때 도저히 구원 얻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회개 기도하고 고행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필자가 종종 행위구원론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 드는 실례가 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자신의 피를 조금 더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과 똑같다. 나의 죄를 씻는 것은 100%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은 것이지 만약 내 피가 1%라도 들어 있다면 내 핏속에 들어간 원죄 때문에 나의 죄는 씻을 수 없다. 오직 100%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 곧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내 행위를 1%라도 의지하게 되면 구원의 실격자가 된다. 그 행위는 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답은 야고보서에서 가르쳐준다. 먼저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하지 말라.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한다. 야고보서의 '선행'은 믿는 자이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열매이다. 이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여기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선행이 없다면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역설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진정한 믿음의 증거임을 알 수 있다.
1) 샌더스(E. P. Sanders)가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를 주장한 이후에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고 주장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는 편향된 주장이라고 본다. 샌더스가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행위구원론과 관련된 자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쿰란공동체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주석하면서 "의인"을 "율법을 행하는 자"(doer of the Law)라고 해석하고 있다. 샌더스는 왜 이런 자료는 보지 못하는가?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다. 언뜻 보면 어떻게 성경에서 이렇게 대조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먼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을 함께 보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1-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으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1-24)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친숙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다. 분명코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행위를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제단을 바쳤을 것이라는 논리이다(참고, 롬 4:18-22).
그런데 야고보는 이삭을 바친 것을 행위의 관점에서 본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진짜 믿음으로 입증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약 2:24).
이런 관점에서 믿음을 보게 되면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듯이 이런 순종하는 행함 없이는 절대 그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절대 구원을 줄 수 없는 가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서 2장 24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쉽게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관을 요약하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항상 순종이 포함된 진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런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는 순종의 행위가 포함된 믿음이 있고, 순종의 행위가 빠진 가짜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믿음은 바로 두 번째의 가짜 믿음을 두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는 말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바울과 야고보를 대조해서 설명한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야고보가 공격하고 있는 가짜 믿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위구원론자는 개신교인 중에는 극히 드물 것이다. 오늘날 문제점은 우리가 믿노라고 고백하지만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삶 때문에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는 선행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이다. 나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인가? 진정한 믿음이라면 분명히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행은 살아 있는 예배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로 드려진다는 사실을 밝힌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을 잡아서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제물의 몸을 각을 뜬 후에 번제단 위에서 살랐다. 바울은 바로 이 동일한 이미지를 우리 몸에 적용하고 있다. 번제물로 드려진 제물의 몸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산 제물로 드려진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 답이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12:2)함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몸으로 하는 행위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릴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행동 지침이 나온다. 성경은 우리가 성도로서 합당히 행해야 할 바를 이미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다음 덕성의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는 분야를 뽑은 것이다. 사랑, 긍휼, 정의, 정직, 경건, 겸손, 온유, 섬김, 충성, 정절, 인내, 절제, 화목, 양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덕성의 항목들이다. 이를 실천하면 선행의 기본 훈련이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철저히 연구하면 우리의 선행의 지침이 나오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십계명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오늘날 성도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십계명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는 성경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정의 실천의 영역이다. 요즈음 외국인 노동자들과 새터민과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선행을 실천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예배당에 갇힌 신앙 중심에서 삶의 예배 중심으로
이사야 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들은 종교 생활에는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일상의 행위가 문제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인들 문제점이 이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갇힌 신앙 중심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교회 집회는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도 부지런히 다니지만 세상 속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그렇다고 교인들의 신앙적 열정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더 문제가 심각한 그룹은 교회에 다니지만 성경도 전혀 읽지 않고, 개인적인 기도 생활도 전혀 없고, 제자도에 대한 헌신도 전혀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귀중한 진리는 행위에 문제가 생기면 종교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이 없는 신앙을 하나님은 우상숭배나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행위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종교 생활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겠는가? 오늘날도 이 진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의식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부담스럽고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배에 앞서서 우리의 말씀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상의 선행이 우선되어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6일간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일에 우리의 삶을 함께 묶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예배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힘써야 할 분야는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삶의 개혁에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다음 항목들을 점검하면서 자기 개혁을 위해 함께 힘써 보자.
*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은 자기희생을 통해 표현된다.
* 어려움에 처한 자를 볼 때 마음속으로부터 긍휼히 여기는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삶에서 나타나는가?
* 나는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가? 가족, 교인, 친구, 이웃, 직장 동료 등.
* 나의 생각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나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거룩한 생각으로 훈련할 수 있겠는가?
* 나는 어떤 사건을 접할 때 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가, 아니면 일의 정의로운 해결을 먼저 생각하는가?
* 나는 금전 문제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직한가?
* 나의 언행은 경건한가?
* 나에게 교만한 모습은 없는가? 나는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는가? 겸손의 기본적인 개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빌2:3).
* 나의 거친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적은 없는가? 매사에 온유한가?
* 나에게 진정으로 섬김의 정신이 있는가? 아니면 군림하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가?
* 나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적당히 눈가림으로 때우려는 마음은 없는가?
* 나는 정절을 잘 지키고 있는가?
* 나에게 절제력과 인내심은 있는가?
*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가?
* 매사에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 나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가? 혹시 잘 지켜지지 않는 계명이 있다면 어떻게 지키겠는가?
잠언은 우리의 행위를 위한 좋은 안내서이다. 가능하면 매일 읽으면서 삶을 고쳐 보자.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2016년 10월 12일 수요일

[기독일보 보도] 청중들 뇌리에 '그림'으로 남는 설교를 하려면

김진규 교수의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 대해 기독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보도내용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누르세요.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4998/20151012/%EC%B2%AD%EC%A4%91%EB%93%A4-%EB%87%8C%EB%A6%AC%EC%97%90-%EA%B7%B8%EB%A6%BC%EC%9C%BC%EB%A1%9C-%EB%82%A8%EB%8A%94-%EC%84%A4%EA%B5%90%EB%A5%BC-%ED%95%98%EB%A0%A4%EB%A9%B4.htm

[월간목회 보도]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 (2016년 9월호; 화제의 책)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 책이 2016년 9월호 <월간목회>의 "화제의 책"으로 실렸습니다.







[목회와신학 서평]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2015년 12월호)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 대한 서평이 <목회와 신학> 2015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서평자는 ACTS의 설교학 교수인 신성욱 교수이고, 제목은 "'전달형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이라는 제목으로 Book 리뷰 섹션에 실렸습니다.




[도서 출판]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 (생명의 말씀사, 2015)

(아래 링크를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책 소개 내용입니다.

<책 소개>

 이 책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생명력의 원리와 감동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발하는가?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감동과 감화를 일으키는가?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약성경의 히브리 시인들이 사용한 언어에서 찾는다. 히브리 시(詩)라고 하면 단지 구약성경의 시가서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선지서 대부분이 시(詩)문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시의 이해는 시가서 뿐만 아니라 선지서의 이해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히브리 시의 3가지 두드러진 문예적 특성은 그림 언어(이미지), 대구법과 생략법이다. 생략법은 설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생략하고, 이 책은 그림 언어와 대구법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필자는 생동감과 생명력의 원리의 핵심으로 ‘그림 언어’(image)를 소개한다. 그림 언어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도록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말들을 가리킨다. 그림 언어가 어떻게 청중의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발하는가?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해방식이라고 워런 위어스비는 말한다. 오늘날 TV, 영화, 드라마 등 시청각물은 시청자의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놓는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청중들은 이미 마음속에 이런 수천수만 장의 그림들을 머리에 새기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어떻게 이들의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들을 바꿀 수 있겠는가? 이 과제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의 청중들의 뇌리에 새겨진 그림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들의 마음속의 영상을 능가하는 그림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속의 그림이 바뀌게 되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래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설교학자들은 그림 언어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설교학 책들은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기여하고 있는 점은 그림언어의 작동원리를 비롯하여 그림언어의 다양한 종류들과 무엇보다 현시대에 어떻게 그림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 점이 특별한 기여이다. 필자는 시가서 전공자로서 먼저 성경속의 그림 언어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뿐만 아니라 맥스 블랙의 “기호 맥락” 개념과 고대 근동의 유사 이미지 해석과 오트마 킬의 고대 예술품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최첨단의 이미지 해석 이론들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학문적으로 어렵게 푸는 책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점이 장점 중에 하나이다. 
  그림 언어의 사용의 편의를 위해서 그림 언어의 분류도 전통적인 수사학적 분류가 아니라, 그림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분류하고 있고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림 언어를 사용하는 주된 수사기법인 은유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의인법, 환유법, 제유법, 우화, 비유, 상징법 등이 그림 언어의 관점에서 어떻게 은유법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누구나 이런 기법들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특히 그림 언어 사용을 성경 속에 제한하는 좁은 견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현시대에 효과적으로 그림 언어를 사용하기 위한 비법을 가르쳐준다. 현시대에 호소력 있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미지의 현대화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한다. 자연속의 그림 언어 사용법, 사회문화 속의 그림 언어 사용법, 도시 사회의 그림 언어 사용법, 과학기술속의 그림 언어 사용법, 연령·성별·계층별 그림 언어 사용법, 스포츠·영화·드라마속의 이미지 사용법, 현시대의 사상적 흐름속의 이미지 사용법, 상징적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미지의 현대화의 원리를 가르쳐준다. 또 이런 그림 언어들을 어떻게 수집할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야기를 예화라는 그림 언어로 사용할 경우에는 내러티브 이론을 도입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방법까지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감동과 감화의 원리를 소개한다. 이는 바로 “대구법”(parallelism)이 답이다. 유명한 설교학자인 브라이언 채플은 “반복이 가장 강력한 구두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설교학에서는 주로 대구법이나 반복법에 대한 중요성은 많이 강조해왔지만, 성서학에서 1980년대 이후에 이룬 대구법의 “강화 강조의 원리”를 아직까지 설교학에 도입한 학자는 거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이후에 히브리 시의 이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쿠걸과 올터의 대구법 이론을 설교에 도입하고 있다. 나아가 벌린이 이들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포괄적인 대구법이론을 도입함으로써 현시대에 이룬 대구법의 탁월한 업적들을 설교학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 설교학자들이 강조해온 대구법의 단순한 분류를 뛰어 넘어 성서학의 최첨단에서 다루는 대구법 이론을 도입하여 어휘적-의미론적 대구법, 문법적 대구법, 음성학적 대구법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대구법 이론을 다루면서 어떻게 설교에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도 역시 딱딱한 이론이지만,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탁월한 설교자들의 설교문을 분석하면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설교적인 관점에서 이 책이 대구법 사용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점은 대구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있다. 구체화를 통한 강화의 원리, 초점화를 통한 강화의 원리, 이미지를 사용한 강화의 원리, 극화를 통한 강화의 원리, 과장법을 통한 강화의 원리, 직유나 은유를 통한 강화의 원리, 점강적 반복을 통한 강화의 원리, 후렴을 사용한 강화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대구법 사용의 비법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2, 3부의 마지막에는 성경과 교회역사속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문을 분석하면서 그림 언어와 대구법 사용 방법을 분석해내고 있다. 실례들을 통하여 어떻게 그림 언어와 대구법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본서를 통하여 탁월한 설교자들이 구사했던 생동감과 생명력이 넘치는 이미지와 감동과 감화를 유발하는 대구법을 이제는 누구나 쉽게 배워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16년 10월 11일 화요일

[뉴스앤조이 기고글] 잘나가는 목회자들이 왜 성범죄에 빠지는가?

수년 전에 이민 목회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교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목회자 중 한 사람이 여성도들과 불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 한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잘 알던 분이었기에 내가 받은 충격은 훨씬 더 컸다.
단순히 제7계명을 범했다는 사실을 넘어 상당한 영적인 혼란이 왔다. 그가 상당 기간 불륜 관계를 맺어 왔는데, 그가 매 주일 전했던 은혜로운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가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였는가, 아니면 화려한 언어 쇼였는가?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역사였는가, 마귀의 장난이었는가? 어떻게 그렇게도 순수해 보이던 분이 그런 일을 행했는가? 등등 복잡한 생각들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가까이에서 잘 알던 유능한 사역자들이 이런 범죄로 인하여 교회를 사임하거나 사역을 그만둔 경우들을 볼 때마다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든다. 그들이 가진 신앙 자체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였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경고했던 거짓 선지자들에 속한 사람들인가? 이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 믿는다. 하지만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마 7:15-23; 벧후 2:1-2).
잘나가는 목회자들이 왜 넘어질까?
왜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성경이 그렇게도 금하고 있는 제7계명을 어길까? 왜 유례없는 사역 업적을 남긴 목회자가 자신이 사역하고 있던 교회 청년의 나체를 보고 싶었을까?
비신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왜 유능한 부장판사가 성매매를 할까? 왜 S대 유명한 K 교수는 제자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을까? 왜 아버지가 자신의 초등생 딸을 성폭행할까? 왜 공직자들의 성 접대가 끊이지 않을까? 인간 행동의 동기가 수천수만 가지이듯이 성적인 범죄의 동기도 그렇게 다양하고 많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신자든 비신자든, 중직자든 초신자든 성범죄 가능성의 덫은 항상 모든 인간들 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이다.
가나안 7족속들을 비롯하여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성적인 유혹은 인류에게 큰 재앙이었다. 바알과 아세라라는 하늘의 남녀 신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땅에서 인간들이 음란 행위를 한 것이 수많은 인간을 죄로 끌어들인 강력한 유인 장치였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걸려 넘어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유수라는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나님은 미리 이들 우상숭배의 영향력을 아셨기 때문에 가나안 7족속을 철저히 진멸하도록 명령하셨다. 나방이 불속으로 끌려들어가 불에 타 죽듯이 성적인 유혹이라는 미끼에 걸려 수많은 인간이 비극을 맞이하였다. 그중에는 삼손도 있고, 다윗도 있고, 그의 아들 암논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왜 다윗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성적인 죄에는 그리도 약하였을까? 왜 J 목사와 같이 탁월한 사역 업적을 남긴 사람이 그렇게도 성추행에 넘어가게 되었을까? 왜 L 목사와 같은 수많은 학생에게 영향력을 발휘한 사역자가 미성년자를 유인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만들었을까?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면서까지 연약한 영혼을 짓밟게 되었을까?
이들이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과 열정이 없어서 그렇게 했겠는가? 다윗과 같은 열정적인 종교심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들에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J 목사는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한때는 대단한 능력이 나타났던 사역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치명적인 함정에 걸리게 되었을까? 왜 L 목사는 그렇게도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동시에 그렇게 몹쓸 짓을 오랫동안 미성년자에게 행했을까?
근본적인 원인은 단 한 가지라고 본다. 구원받은 사람이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건 간에 '인간은 여전히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의 영적인 거장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면서 자신이 여전히 타락한 인간임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 영적으로 충천한 나머지 여자들의 '안마'쯤은 우습게 여기는 영적인 자만심 때문은 아닐까? 이런 영적인 영향력 때문에 그의 위험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권고는 아예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후문을 들었다.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들고 있는 인간의 실존
어느 날 TV에서 본 것이다. 악어를 잘 다루는 유명한 술사가 있었다. 그는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자신의 머리를 악어 입 속에 넣었다 빼냈다 했다. 어느 날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술사는 자신의 머리를 넣었다. 순간 악어는 술사의 머리를 꽉 물어 버렸다. 지켜보던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러 사람들이 달려와서 악어의 입을 열어젖히고 간신히 그를 살렸다.
악어는 기이한 동물이어서 자신의 벌린 입에 모래 한 조각만 떨어져도 탁 소리가 나도록 입을 다문다. 그날도 악어 술사가 자신의 머리를 악어 입에 집어넣는데, 미처 닦지 않은 땀 한 방울이 악어 입에 떨어진 것이다. 그 순간 악어는 입을 콱 닫아 버렸다. 나중에 그의 얼굴에는 흉측한 악어 이빨 자국이 남았다.
벌린 악어 입에 머리를 넣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성범죄에 놀아난 사람들이 처음부터 성범죄라는 함정에 빠져들었겠는가? 처음에는 가벼운 안마를 부탁하면서 등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했을지 모른다(J, L 목사의 경우에 모두 안마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런 장난이 결국 벌어진 악어 입과 같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대단한 영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능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대단한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비신자이건 간에 인간이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타락한 존재란 사실을 한순간에 망각한 것이다.
필자는 타락한 본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인간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쥐고 있는 존재'로 종종 묘사한다.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얼마나 위험한가? 한순간이라도 방심하게 되면 곧 폭발하여 자신과 주위에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일 수 있다. 대단한 영적인 능력에 대한 자만심 때문에 자신의 몸이라는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잊고 방치하다가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범죄의 엄청난 결과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 일선에 내보내어 죽게 한 후에 그가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는 용서하셨지만 그의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심판을 선언하셨다. 먼저 불륜으로 인해 낳은 아기가 죽었다. 그 이후 다윗의 네 아들이 죽었다.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다윗의 비통한 울음은 바로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아들이 대신 죽었다는 죄책감에서 나온 절규가 아닐까?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로 이런 결과가 따를 것을 알았더라면 감히 그런 죄를 지었겠는가?
이번에 발생한 L 목사 사건도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여러 언론에서 심층 보도를 하고 있고, 기독교 성직자 이미지와 기독교 이미지가 함께 추락하고 있다. 본인이 사역을 그만두는 정도가 아니다. 교단에서도 그의 죄에 상당한 처벌을 하리라고 본다. 형사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는 앞으로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가정적으로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겠는가? 이런 결과를 그가 알았더라면 이런 죄를 지었겠는가?
죄지을 틈을 주지 말라
벌린 악어 입에 얼굴을 들이밀지 말라. 사탄이 유혹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피해 여성이 당부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남자 사역자들이 여성도를 대할 때에는 사모님이나 다른 사역자들과 함께 만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두 사람씩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였겠는가? 왜 바울이 소그룹으로 사역을 행했겠는가?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실라가 함께 사역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어떻게 빌립보 성에서 여자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목회자가 여성도를 일대일로 상담을 해야 한다면 문을 열어 놓고 하면 좋을 것이다. 요즈음 CCTV가 발달해 있으니 사역자의 방이나 상담실에 CCTV를 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CCTV는 성범죄를 막아 줄 뿐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을 향한 부당한 소송이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죄는 마음으로부터
성범죄를 범한 목회자들이 처음부터 죄에 빠진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랜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과정이 가장 큰 문제의 출발점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타락한 마음'이다. 믿는 자는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어 갈 뿐이지 여전히 타락한 마음을 갖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경고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이건 비신자들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타락한 심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끌리는 여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다음이 중요하다. 끌림이 생각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끌린다고 해서 마음으로 품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에 죄가 생기게 된다. 마음의 죄는 곧 죄악이란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간음죄를 차단하도록 가르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성범죄에 빠진 사역자들이 먼저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그 대상을 생각하면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목회자가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간음죄를 짓지 않았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 마음으로 계속 간음죄를 짓고 있다면 얼마나 비극인가? 마음에 쌓인 것이 결국 행동으로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목회자는 항상 자신의 마음에 잡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경건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은 주로 보고 듣는 데서 온다. 마음에 잡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듣고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영향력 있던 텔레비전 전도자 지미 스웨거 목사는, 두 차례에 걸쳐서 성매매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역에서 완전히 퇴출당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죄에 빠진 내력을 실토했다. 자신이 청소년 시절에 본 포르노 때문에 결국에 죄에 빠졌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오늘날 컴퓨터는 음란물이 쏟아지는 도구이다. 정말 모든 성도는 보는 눈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죄에 물들지 않을 것이고 죄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거짓 선지자도 있을 수 있다
성범죄자들 중에는 거짓 선지자/교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의식도 없이 상습적인 성범죄를 짓는 자들과 회개치 않는 범죄자들은 거짓 선지자/교사일 수도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교단적 차원에서 엄정하게 평가해서 이런 자들을 출교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일 것이다.
목회자 후보생 투표해서 뽑으라
오늘날 날이 갈수록 개신교 목회자들의 자질 문제가 자주 거론된다. 그 근본 원인이 목회자 후보생을 선발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요즈음 대부분 교단 신대원들은 목회자 후보생을 뽑을 때, 시험 외에 소속 교단 목회자 추천서만 제출하면 될 것이다. 단지 목회자 추천만으로는 목회자 후보생을 뽑는 데 상당한 한계가 있다.
대부분 교단의 교회에서 장로나 안수집사를 뽑을 경우에는 공동의회에서 2/3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한다. 이는 인선의 대단히 중요한 절차라고 본다. 그런데 신대원에 진학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는 이런 과정을 요구하는 교단이 내가 알기로는 없다. 장로나 안수집사 직도 중요하지만 양무리를 목양할 목회자를 선발하는 데 성도의 공인된 평가 없이 단지 목회자의 추천만으로 뽑는 인선 과정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신대원 진학을 앞둔 학생은 단지 목사 한 사람에게 잘 보여서 추천서를 받을 수도 있다.
개신교 목회자의 자질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목회자 후보생들의 신앙과 삶을 잘 아는 성도들 전체의 공동의회를 통해서 뽑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렇게나 신학교에 오겠다는 사람들을 걸러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인으로서 신앙과 삶에 모범이 되지 않으면 선발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학생들이 점점 줄어드는 마당에 힘들지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개신교 목회자의 자질은 더욱 떨어질지 모르겠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교단적 차원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뉴스앤조이 기고글] 메시아의 대속적 고난은 치병을 포함하는가?

아래는 백석대학교 김진규 교수가 <백석신학저널>에 실었던 논문을 제목을 바꾸어 기고한 글임을 밝힌다. 히브리어 원문은 폰트가 깨지는 문제로 한글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원출처: 김진규, "이사야 53:4-5은 치병을 위한 대속을 포함하는가?", <백석신학저널> 제22권 (2012.6.1.), 349~361. - 편집자 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4-5)
이사야 53:4-5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가장 잘 예언하고 있는 구약 본문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반역"(페솨; "허물," 개역개정)과 "죄악"(아본)을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홀리)와 "고통"(마크오브; "슬픔," 개역개정)에서의 대속을 포함하고 있는가? 4절에 사용된 "질고"와 "고통"은 영적인 질병, 즉 죄를 지칭하는 비유적인 의미인가? 아니면 육신적인 질병을 지칭하는가? 그리고 5절에 사용된 "나음"(라파)은 어떤 나음을 의미하는가? 영적인 치유인가, 육신적인 치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의 치유도 포함하는 개념인가?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문의 해석에 문제가 된 것은 칼빈이 본문에 나오는 치유를 영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면서이다.1) 과연 본문이 계시하고 있는 치유는 오직 영적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도 포함하고 있는가? 본 소고는 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사야 52:13-53:12에 나오는 '고난의 종'과 '우리'에 대한 해석
여기에 나오는 3인칭 단수의 "내 종"(아브디) 혹은 "그"(후)와 1인칭 복수의 "우리"(아나흐누)가 누구를 지칭하는가가 본문 해석의 열쇠이다. 이사야 40-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왜냐하면 이사야 40-53장에 나오는 종에 대한 지칭 대상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를, 어떤 경우에는 고레스를 지칭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어떤 경우에는 3인칭 단수의 고난의 종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종에 대한 지칭 대상을 분류한다면 한 개인, 혹은 한 집단, 이상적인 인물, 시기마다 다른 역사적인 해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2) 고난의 종의 지칭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본 논문의 연구를 넘어간다.
이사야 40:1-52:12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본문에 나오는 고난의 종에게 일괄되게 적용할 수가 없다. 이유는 전술한 대로 이들 본문 안에서 고난의 종에 대한 지칭 대상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내 종"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 자체가 요구하는 조건에 충실히 일치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1) "내 종"은 3인칭 단수 "그"라는 대명사로 받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3인칭 단수가 집단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만, 현 본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1인칭 복수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가 집단적 의미로 사용된다면 수의 혼동을 피할 수가 없다.
(2) 그는 매우 비천한 출신이어야 하고, 또 사람들의 멸시와 버림을 당한 사람이다(53:2-3).
(3) 그는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다. 그의 고난은 특히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53:4-6, 8, 10, 11, 12). 또 그의 고난은 치유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는 고난이어야 한다. 이런 대속적 고난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무죄한 사람이어야 한다.3)
(4)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허용하심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5) 또 그의 고난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다(53:12;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이러한 조건을 온전히 만족시킬 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4)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였던 세례 요한이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가? 그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을 당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가? 이스라엘 민족은 먼저 첫 번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를 집단적인 의미로 택한다고 할지라도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고난당한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고난당하였지,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레스는 어떤가? 고레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무죄한 자가 아니다. 그도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을 당할 수가 없다.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우리"의 지칭 대상을 결정하는 것도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검토해야 올바른 해석에 도달하리라고 본다. 이사야 52:13-53:12에 "우리"가 사용된 구절을 검토해 보자.
(1) 메시지의 전달자(이사야)가 "우리"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5)
(2) "우리"라는 공동체는 고난의 종을 보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또한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53:2-3).
(3) 고난의 종은 "우리"를 위한 대속적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는 오해하기를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줄로 알고 있다(53:4).6) 고난의 종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속적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평화와 치유를 위해서도 고난을 당한다(53:5).7)
(4)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고난의 종에게 담당시키셨다. 고로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다(53:6). Young에 의하면, 여기 "우리"는 이사야 자신을 포함해서 그가 말하는 대상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았다.8)
(5) "우리"는 곧 "내 백성"이라고 정체가 밝혀진다(53:8). 여기서 고난의 종은 "내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 때문에 대속적 고난을 당하였다.9)
위의 구절들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면, "우리"는 이사야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민족적 백성의 차원을 넘어 이사야 자신과 같이 선택된 언약 백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0)
이사야 53:4-5에 등장하는 치병과 관련된 표현들
본 논문을 위해서 이사야 52:13-53:12 전체를 주석한 후에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지면상 그리고 논문의 목적을 살려 이사야 53:4-5에 나오는 치병과 관련된 구절을 중심으로 다루겠다. 사실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위에서 다룬 '고난의 종'과 '우리'에 대한 지칭 대상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다루었다.
이제 위에서 밝힌 지칭 대상을 근거로 본문에 나오는 치병과 관계된 표현을 다루고자 한다. 본문에는 치병과 관계된 표현이 3가지가 등장한다. 4절에 나오는 "질고"(홀리)와 "고통"(마크오브)이라는 말과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우바하부라토 니르파라누)라는 표현이다.
"질고"(홀리; 4절)라는 말의 번역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이사야 53:3-4에 나오는 "홀리"라는 말을 "grief"(슬픔; KJV, RSV, ESV, ASV, NASB)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번역에는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BDB의 정의를 따르더라도 보증받지 못할 번역이다. BDB는 이의 의미를 "질병"(sickness)으로 번역하고 있다.11)
R. K. Harrison에 의하면 여기에 사용된 "홀리"라는 말은 "여러 정도의 질병들을 위한 일반적인 용어"(왕상 17:17; 전 6:2)이고 "잡다한 병"(신 28:59)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12) 이사야 38:9에는 히스기야가 앓은 질병을 가리킬 때, 이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었고, 이사야 1:5에는 "온 머리는 병들었고"(콜 로쉬 라홀리)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이 두 경우를 보면 문자적인 질병을 의미한다. 이사야 53:3에도 "홀리"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한글 개역개정판에는 4절과 같이 모두 "질고"(홀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문자적인 질병을 의미한다.
해리슨은 이의 문자적인 의미인 "질병"이란 뜻에 기초해서 고난의 종이 이스라엘을 위한 구속 사역의 일환으로 이와 같은 질병을 짊어지게 되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이 고난의 종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힘으로써, 그의 대속사역이 죄악된 인간의 상태뿐만 아니라 질병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3) 마태복음 8장 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치병사역의 맥락에서,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14)
그리스도의 치병 사역의 근거는 그 자신이 우리의 ‘질병’을 지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치병 사역은 그의 대속적 치병에 근거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해리슨 이전에 델리취도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델리취는 본 절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한 중보가 우리의 죄를 속할 때의 중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15) 즉 그리스도의 대속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고난의 종은 우리의 고난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우리가 져야 할 고난을 지셨다. 그는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우리의 질고와 고통을 가져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몸에 이를 지셨다.16) 이는 분명히 질병 치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통"(마크오브; 4절)이란 말의 번역
BDB는 "마크오브"를 육체적, 정신적 고통(physical, mental pain)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17) T. E. Fretheim에 의하면 이 단어에 대한 번역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고통"(pain)이란 뜻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때로는 좀 더 추상적인 "고난"(suffering)이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상처"(wound) 혹은 "질병"(diseases)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는 문맥이 고통을 야기한 요소를 명시하는 경우이다.18) NRSV는 이에 맞추어 "마크오브"를 "diseases"(질병들)로 번역하고 있으나, 대부분 다른 영역본들(KJV, ASV, ESV, RSV, NIV, NJB, NASB)은 "sorrows"(슬픔들)로 번역하고 있다. 후자의 번역은 BDB나 NIDOTTE 등 권위 있는 사전들이 전혀 보증하지 않는 번역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사야 53:4에 사용된 "마크오브"는 “고통”(pain)이라는 번역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보이고, 아니면 (NRSV가 번역하고 있듯이) "질병"(diseases)이라는 의미로 번역해도 무난하다고 생각한다.19)
여기서 이사야는 "마크오브"를 "홀리"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우리의 질병뿐만 아니라 질병과 함께 수반되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까지 함께 대속하실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질병은 질병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함께 따르기 때문에 이 양자를 함께 대속할 때, 그리스도의 질병에 대한 대속 사역은 온전한 대속이 될 수 있다.
델리취가 위에서 잘 관측했듯이, 이사야 53:4에서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죄에 대한 문제(이는 5절에서 다룸)가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고통(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병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20) 이 해석은 다음 구절을 이해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우바하부라토 니르파라누; 5절)의 해석21)
이사야 53:5는 고난의 종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속적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가장 명백히 밝힌 구절 중에 하나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22)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23)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개역개정판).
본 절은 고난의 종이 죽음에 이르도록 파괴를 경험하며 죽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반역죄와 죄악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24)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반역과 죄악을 위한 대속적 고난임을 명백히 예언한 말씀이다.25) 그리스도가 징계를 받은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대속적 징계임을 또한 밝히고 있다.
여기에 암시하고 있는 바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평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26) 그런데 그리스도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 깨어진 평화가 회복되었다.27) 그의 징계도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대속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은 것도 우리의 나음을 위한 대속적인 채찍 맞음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이 여기서 연구의 초점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어는 "나음"(라파)이라는 말이다. 이 나음이 육신적인 나음인가, 아니면 영적인 나음을 의미하는가가 관건이다. 성경에서 "라파"라는 말을 문자적인 치유와 비유적/영적인 치유를 위해서 모두 사용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라파”는 문자적 치유와 영적인 치유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치유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선지서에서 선지자의 희망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표현하고 있다.28)
M. L. Brown은 이사야 53:4-5가 "라파"를 전인적 치유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구절로 예를 들고 있다.29) 이사야 53:5의 히브리어 원문은 2가지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30) J. A. Motyer도 이 구절에서 이사야가 메시야 시대의 표지인 충만함과 완전함을 회복하는 전인의 치유를 뜻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치유'(healing)를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31)
그런데 이를 영적인 치유로만 국한시킨 것은 문제가 있는 해석이다. 특히 성경의 점진적 계시를 따라, 이의 의미가 신약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서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한 것은 5절의 '치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마태복음 8장 17절은 이사야 53장 4절에 나오는 '질고'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태복음 8:14-17에서 다루는 주제는 영적인 질병(즉, 죄 문제)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질병들이다.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근거가 바로 그 자신이 이런 질병들을 짊어지신 대속적 사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병을 고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다("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이를 종합하면, 이사야 53장 5절에 나오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표현을 우리의 영적인 질병(반역과 죄악)과 심리적인 질병(평화의 상실)과 아울러 우리의 육신적인 질병(질고와 고통)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해석일 것이다.
후자 2가지를 빼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죄만을 지셨다고 영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본문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평화의 회복과 육신의 질병의 치유를 배제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죄 문제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로 따라오는 평화의 상실과 질병의 문제까지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인 대속 사역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병 사역 때문에 현대 의술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현대의술은 하나님의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주신 귀한 선물이기에 사용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의술이 발달해도 아직 고치지 못하는 질병이 대부분이다. 현대 의술로 완치할 수 있는 질병은 2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 의술이 고치지 못하는 암과 같은 질병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유의 능력으로 고쳐진 수많은 사례가 있다.32) 하나의 중요한 예를 들면, 나겸일 목사의 간증을 참고하라.33)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은 영적, 정신적, 육신적 구속을 포괄하는 사역이었다
이사야 53:4-5에 나오는 치유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 데는 먼저 칼빈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그 다음에 많은 영역본들이 본문에 나오는 치유와 관계된 표현들을 영적/비유적인 의미로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질고"(홀리; 4절)라는 말과 "고통"(마크오브; 4절)이라는 말을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grief"와 "sorrows"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히브리어 사전의 정의에서도 보증될 수 없는 번역들이다. 4절의 질고와 고통은 문자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된 고통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실 마태복음 8장 17절이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3가지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둘째, 그리스도의 징계 받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의 채찍 맞음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본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질고"(홀리)와 "고통"(마크오브)을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적 치병 사역을 행하실 것을 가장 분명히 예언한 본문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5절에 사용된 "나음"(라파)은 우리의 영적인 치유(죄의 용서)와 관계적인 치유(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회복)와 육신적인 치유(질병에서의 치유)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은 이 3가지를 포괄하는 3중적인 대속이다. 본문에 나오는 치유의 메시지는 우리의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 할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병 사역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복음은 영혼 구원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깨어진 관계 회복의 메시지요, 치병의 메시지이다.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각주
1) J. Calvin, Isaiah 33-66 (trans. W. Pringle; Calvin's Commentaries, vol. 8; Grand Rapids: Baker Books, 2005), 115.
2) R. K. Harrison, "Servant of the Lord," ISBE 4:421~423.
3) F. Delitzsch, Isaiah, (trans. J. Martin; C. F. Keil &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7; Peabody, Ma: Hendrickson, 1996), 507~510;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vol. 3: Chapters 40-66 (Grand Rapids: Eerdmans, 1993), 345~349.
4) Young, Isaiah, vol. 3, 348.
5) 이사야 53장 1절에 나오는 "숴무아테누"를 주로 2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우리가 들은 메시지"로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포한 메시지"라는 견해이다. RSV는 전자의 해석을 따라 번역("Who has believed what we have heard?")하고 있고, ESV는 후자를 따라 번역("Who has believed what they heard from us?")하고 있다. 루터와 영과 개역개정판 성경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이것이 문맥과도 더 잘 어울린다. 영은 신약도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요 12:38; 롬 10:16). Young, Isaiah, vol. 3, 340.
6) Young, Isaiah, vol. 3, 345~346.
7) 여기에 암시하고 있는 바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평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속적 징계가 있어야 하다는 뜻이다. Young, Isaiah, vol. 3, 349.
8) Young, Isaiah, vol. 3, 350. 그러나 이 표현에서 "보편적 대속의 교리"("a doctrine of universal atonement")를 도출하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9) Young, Isaiah, vol. 3, 352.
10) 신약의 완성된 관점에서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새 이스라엘 백성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갈 3:7). 그리스도의 대속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구속 사역이기 때문이다.
11) F. Brown, et al., "홀리", The New Brown-Driver-Briggs-Gesenius Hebrew and English Lexicon with an Appendix Containing the Biblical Aramaic (Peabody, MA: Hendrickson, 1979), 318. 단지 NIV, NJB는 "suffering"(고난)으로 번역하고 있고, NRSV는 "infirmity"(허약, 질병)로 번역하고 있다. NIV와 NJB의 번역도 원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고, 단지 NRSV는 질병으로 번역될 수 있는 문을 열어 두었다.
12) R. K. Harrison, "khlh," NIDOTTE 2:140-143.
13) Ibid.
14) Young, Isaiah, vol. 3, 345. 영은 이사야 53:4의 질고가 죄 자체를 위한 비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마태복음 8:17의 관점에서 이는 또한 죄의 결과 즉 질병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질병은 죄와 분리할 수 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15) Delitzsch, Isaiah, 508. 델리취는 여기서 마태복음 8:17을 인용하고 있다.
16) Ibid.
17) Brown, "홀리," 456 (#4341).
18) T. E. Fretheim, "k’b," NIDOTTE 2:575~576.
19) 한글의 경우에 수적인 개념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diseases를 '질병'이라고 번역해도 무난하다고 본다.
20) Delitzsch, Isaiah, 508.
21) Young에 의하면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비인칭적이기 때문에 원문의 의미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에게 치료가 있다"("and by his stripes there is healing to us.") 혹은 "치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healing was imparted to us.")는 뜻이다. Young, Isaiah, vol. 3, 349.
22) 여기에 "찔림"이란 말을 위해 사용된 원문(머홀랄)은 "죽음에 이르도록 찌르는 것"을 의미한다. Delitzsch, Isaiah, 509; Young, Isaiah, vol. 3, 347. 본 절에 나오는 개역개정판의 "허물"이란 번역은 좀 약한 번역이다. 원문(페솨)의 뜻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rebellion")을 주로 의미한다(NJB). 많은 영역본들은 "transgressions"([종교적인] 죄)로 번역하고 있다(KJV, ASB, NASB, RSV, NRSV, ESV, NIV). 여기서 죄는 인간에게 범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후자의 번역도 타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Young, Isaiah, vol. 3, 347.
23) 여기에 "상함"이란 말의 원문(머두카)의 뜻은 "관계된 사람의 완전한 파괴"("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person involved")를 암시한다. Young, Isaiah, vol. 3, 347.
24) Ibid., 348.
25) Delitzsch, Isaiah, 509.
26) 여기에 사용된 "평화"라는 말은 단순한 우리의 "웰빙"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인간과 유지하고 있는 평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리라. Young, Isaiah, vol. 3, 348~349.
27) 여기에 수반된 아이디어는 "회복시키는 징계"("restoring chastisement")이다. Delitzsch, Isaiah, 510.
28) M. L. Brown, et al., "rp’," NIDOTTE 1162~1173(특히 1166쪽을 보라).
29) Ibid., 1166.
30) Ibid.
31) 이는 Brown의 글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Brown, "rp’," 1166.
32) 1996년 6월 24일에 발간된 TIME지에 '믿음과 치유'(Faith & Healing)란 기사가 실렸다. 이 글에 현대 의술에서 믿음과 치유, 기도와 치유가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실험한 내용이 실렸다. 그간 여러 실험 결과들을 소개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하버드 의과대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의 연구결과 병자를 위해서 기도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치료의 효과 면에서 거의 3배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현대 의술이 믿음을 통한 치유의 능력을 입증한 셈이다.
33) 나겸일, <생명을 건 목회 이야기> (서울: 두란노, 2003), 135~166.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뉴스앤조이 기고글] 범죄자들이 가장 악용하는 성경 구절

교회 중직자나 성직자의 범죄 사실이 들통나면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주 악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8장 3-11절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죄책감 눌린 이들은 모두 돌을 놓고 사라져 버린다. 홀로 남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11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인을 향해 정죄의 돌을 들지 않고 돌려보낸다.
범죄자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죄가 없느냐, 왜 나를 정죄하느냐"고 오히려 큰소리친다.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는데, "왜 내 죄를 갖고 왈가왈부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정말 이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요한복음 8장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일까?
사본학적 의문점들
사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본문 자체가 오래된 사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성에 있어서 상당한 의문점을 남긴다. 대부분 고대 사본에는 없고 중세 사본에 등장한다.1) 본문이 배치된 곳도 다양하다. 어떤 사본에는 누가복음 21:28 다음에 나오고, 어떤 사본에는 요한복음 7:44 혹은 7:36 혹은 21:25 이후에 나타나기도 한다.2)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탁월한 복음주의 신약학자인 카슨(D. A. Carson)은 바로 이런 배치들이 "이의 진정성이 없음을 확증한다"라고까지 말한다.3)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본들은 요한복음 7:53-8:11의 앞뒤에 꺽쇠로 표시해 두고 있다.
카슨은 그럼에도, 오래된 사본에 없다고 해서 예수님께 이런 일이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덧붙인다.4) 요한 사도는 자신의 복음서에 주님의 모든 행적을 포함시킬 수 없음을 솔직히 밝히고 있다(참고, 요 20:30-31). 사본학적인 면은 이 정도로 다루고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음모
먼저 성경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을 들이대면서 예수님께 답을 요청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명하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죄인들과 세리들을 가까이 하시면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함정은, 당시에는 로마 정권이 사형 집행권을 갖고 있어서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선언하면 예수님은 로마법을 위반하게 되어 처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5)
반면에 모세의 법을 어기고 무조건 용서를 선포하게 되면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되어 무법한 자로 취급당할 수 있다.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교묘하게 함정에 빠뜨리고자 이 여인을 끌고 온 것이다. 성경은 이들의 악한 동기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의 상황에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은 이들 모두가 돌을 놓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버렸다.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 나온 증인의 원칙에 호소하고 있는 말씀이다. 죄를 목격한 사람이 먼저 손을 들어 형을 집행하도록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신 13:9; 17:7).8)
율법이 정한 증인의 원칙에 예수님은 하나의 조건을 달고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라는 조건이다. 이 조건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돌을 놓게 만들어 버렸다. 유대인들은 가장 경건한 사람조차도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공동된 가르침을 전한다.9) 돌을 든 무리였지만 이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아무도 감히 돌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왜 여인 홀로 잡혀 왔는가?
둘째로, 이 여인을 홀로 끌고 왔다는 점에서 이들의 음모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구약의 율법은 간음을 행한 경우, 두 사람을 모두 처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0:10; 신 22:23-24). 왜 여인만 끌고 왔는가? 함께 간음죄를 범한 남자는 어디에 갔는가?
율법에 두 사람이 함께 처형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는 들판에서 약혼한 처녀가 강간을 당했을 때다. 이때는 여자가 소리를 질러도 사람들이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남자만 처형된다(신 22:25-27). 그 외에는 간음죄를 범하면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처형을 받는다. 구약성경에 간음죄를 지은 여자만 처형되도록 규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여인만 이렇게 끌려온 것 자체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한 함정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여인만 불쌍한 희생양이 된 것을 잘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 예수님께 율법대로 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들의 악한 동기를 몰랐겠는가?
보편적인 죄인가 특정한 죄인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이 특정한 모함하는 죄에 개입되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그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10)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라는 말씀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구약시대에 죄인을 처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어느 누가 죄 없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구약시대에 모세의 율법대로 형을 집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이 특별한 경우의 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너는 죄가 없느냐 감히 나를 정죄하느냐"라고 큰소리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두 가지 이유
첫째, 여기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님은 율법대로 죄인을 심판해서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요 3:17).11)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반드시 죽을 수 있는 죄인이라도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셨다. 이것이 주님 사역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믿지 않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이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포하셨다(마 21:31-32).
둘째,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정죄의 돌을 들지 않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라고 경고하시고 보내신 것은 율법의 완성자로서 예수님 자신의 사역 때문이었다고 본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돌을 들 수 없지만, 유일하게 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은 무죄하신 분이시요, 모세의 율법대로 처형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정죄의 돌을 들지 않은 것은 구약시대의 재판법(사회법)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옛 언약에 속한 의식법이나 재판법은 반드시 변혁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약 제사 제도는 완성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양이나 염소를 잡아 바치는 속죄제나 속건제가 필요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게 된다.
구약시대의 재판법(사회법)은 어떤가? 만약 예수님께서 오셔서 재판법의 완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구약의 재판법대로 교회는 간음죄 지은 남녀를 돌로 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하드들의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처형 광경을 교회들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주님의 사역의 성격과도 역행하는 것이다.
모세의 법은 분명히 간음한 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재판법(사회법)을 끝내시고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이 사건에서 보여 주시고 있다.
간음죄 자체는 도덕법인 십계명이 금하고 있는 분명한 죄이다. 그러나 간음죄를 처형하는 방식은 구약시대의 재판법(사회법)에 속한 규정이다. 재판법은 더 이상 신약시대에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형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의 또 다른 측면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8장은 범죄자 방어용으로 사용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8장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말씀은 범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도구로 결코 악용될 수 없다. 중직자나 성직자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 왜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회개를 촉구하는가? 죄를 인정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분명한 회개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게 아니겠는가?
범죄자들이 보여 주는 죄의 모습의 배후에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죄악된 삶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언론에 드러난 성추행범들은 대체로 수년간 이런 죄악된 삶의 방식을 지속했기 때문에 들통이 난 것이다. 많은 경우에 그렇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 단호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을 잘 보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여인의 죄인 됨을 벌써 인정하고 하시는 말씀이다. 여인 자신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어디에도 "저는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는 여인의 항변을 들을 수 없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이제 목숨이 위태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셨지만 결코 그녀의 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이 점을 범죄자들은 놓치고 있는가? 진정으로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도록 주님은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다 부족하여 변화의 속도는 느릴 수 있다. 주님은 반드시 변화를 해야 한다고 요청하시고 있다.
주님은 죄악된 삶도 즐기면서 주님도 따르는 삶을 결코 원치 않는다. 어느 창녀가 주님을 믿은 이후에 창녀 생활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어느 도둑이 주님을 믿은 이후에 그 죄를 즐기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주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는 주님이 요청하기도 전에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주님께 고백했다(눅19:8).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옛 삶을 모두 청산해 버렸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직자가 범죄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믿는 자라고 하면서, 아니 중직자라고 하면서, 아니 성직자라고 하면서 죄를 짓다가 들통이 난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한 죄를 지은 경우에 성경의 가이드는 분명하다.
고린도교회에 계모와 간음한 자가 있는데 교회에서 이들을 징계하지 않았다.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분명하게 책망한다.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누룩이 떡덩이 전체를 변하게 만들 듯이, 이런 범죄자를 그냥 두면 공동체를 변질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공동체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고 있다(고전 5:6-8).
영원히 교제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편으로 공동체를 죄로부터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진짜 그 죄인을 위한 길이요,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길이다. 그래야 개인도 살고 교회도 살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모든 문제는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합당하게 징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세습이라는 누룩 덩어리가 들어오자 이제는 대형 교회만 세습하는 게 아니라 너도나도 앞다투어 세습한다. 세습으로 고통당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이 모함에 의해 잡혀 온 여인을 대한 태도와 예수님이 당시에 가장 신앙이 좋다고 평가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한 태도는 180%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주님이 보인 죄에 대한 태도에는 일관성이 있다. 마태복음 23장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가? 예수님은 회개치 않는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낱낱이 폭로하고 계신다.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랍비와 지도자라는 명예욕에 찌든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천국문을 막고 있는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교인들을 오도하는 이들을 '맹인'이라고 폭로하신다.
율법의 중요한 것은 뒷전에 두고 율법 규정에도 없는 사소한 십일조를 따지는 이들의 앞뒤가 뒤바뀐 위선적인 신앙 행태를 폭로하신다.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찬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폭로하신다.
선지자와 의인들을 핍박하는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마지막에는 이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절)라고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들의 죄는 양심적인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엄청난 죄들이다. 이뿐인가?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철저히 파헤치고 면박을 주고 죄악상을 폭로하셨다.
예수님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그냥 덮고만 지나가신 분이 아니다. 철저히 드러내어 회개를 촉구하신 분이다. 하나님나라는 회개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도 주님도 맨 처음 외친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였다.
당연히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치 않을 때, 예수님은 분노하신다(참고, 눅13:3-5; 마23장). 마땅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치 않을 때, 오늘도 사람들은 분노한다. 아니,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더욱 분노하신다(시 7:11).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각주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91), 333. 예외는 "서방 언셜 글자체의 사본 D"이다.
2) 이는 RSV성경의 각주에 나오는 표기임.
3)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3.
4)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3.
5) Craig S.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VP, 1993), 284.
6)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
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6.
8)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6.
9)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285.
10) 카슨이 비슷한 견해를 취한다.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6.
11)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7.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