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9일 토요일

예수님은 왜 죽으셨나? 두 가지 모순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함께 겹쳐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편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대속물로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히셨다(20: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몇 번씩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게 되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언하셨다. 주님의 죽음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수없이 예언했고, 예수님 자신도 여러 번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역보다도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속적 죽음을 이루시는 일이 중요하셨기 때문에 이 중요한 목적을 향하여 한걸음씩 걸어간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소위 메시야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쉽다. 예수님은 반드시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을 포함한 소수에게는 인정하셨지만 밖으로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셨다. 아마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신 일이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기뻐하시면서 인정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대속적 죽음이란 이 중요한 목적을 방해하려 했던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기도 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심문하던 대제사장에게 바로 죽음에 이르는 답변을 직설적으로 하심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시고 죽음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시는 모습이 아닐까?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죽을 죄인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희망이 있다. 성금요일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밖에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주님이 돌아가시게 된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빌라도 총독과 같은 기득권층의 질시로 죽으셨다.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쫓아다니게 되자 종교적 기득권층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는 군중들이 노골적으로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가 왔다고 생각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지 않았을까? 당시의 메시아관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기득권층들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정치적인 권력을 잡게 되면 로마군대가 진입하게 되고 자신들의 신변에 큰 위협을 당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 예수가 죽는 것이 백성을 위해서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18:14).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당시 종교적 기득권층들은 예수를 없애기로 결정을 내렸고,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낸 장본인들이 바로 종교적 기득권층들이었다. 특히 서기관들은 자신의 성경적 선입견을 갖고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보니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범하기에 그는 메시아일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또 예수님의 출생 배경을 잘 모르는 이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 알았기 때문에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기에 특히 미가 5:2에 근거해서 베들레헴에서 나야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가이사 아구스도의 인구조사 명령으로 예수님의 부모가 베들레헴에 내려갔다가 예언대로 예수님을 그곳에서 출산했다. 서기관들이 이를 알 리가 없다. 단지 나사렛 예수로 알 뿐이었다. 이들은 신학적인 이유로 기득권과 합세해서 예수를 죽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예수가 당시의 로마법으로는 사형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예수를 살려두게 되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하자 큰 위협을 느낀다. 총독 자리라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악인 바라바 대신 의인 예수를 죽도록 내어주게 되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한편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득권의 질시 때문에 죽었다. 하나님이 섭리는 기득권의 질시라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도록 내버려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이 억울함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셨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의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다.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억울하게 죽은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얼마 전 홍정길 목사님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부조리한 현시대에 진정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모델로 그분을 말씀하셨다. 요즈음처럼 따라야할 모범이 적은 시대에 그분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제자도가 뭔가를 보여준 산 예표가 되었다. 좋은 자리의 초청을 거부하고 고난당하는 나병환자들과 애양원에서 사역하셨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용서하며 양아들로 삼은 원자탄급 사랑의 자취를 남긴 세계가 존경하는 분이다.
지금도 종교적 기득권층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참된 주의 제자가 있다. 나 자신은 어느 그룹에 속하는가? 나는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서 의인들을 죽이는 종교적 기득권층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주님처럼 의로운 길을 위해서 나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인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겠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가지 섭리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가 영적인 생사를 좌우하는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