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0일 화요일

[좌담] 신학 교수들의 표절, 사과하면 박수 쳐 주고 끝?




▲ <뉴스앤조이>는 지금까지의 표절 반대 운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이 운동이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를 논의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패널로 나온 양희송 대표, 이성하 목사, 김진규 교수, 신현기 대표, 맹호성 이사는 두 시간의 좌담회 동안 표절 반대 운동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2015년 상반기, 한국 신학계와 신학 출판계는 '표절' 문제로 떠들썩했다. 유수의 신학자들이 표절 의혹에 휘말렸고, 이미 대여섯 명의 굵직한 학자들이 잘못을 시인했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 페이스북에서 이성하 목사(원주가현침례교회) 등 다수의 목회자·신학생·평신도가 가입한 '신학 서적 표절 반대' 그룹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뉴스앤조이>는 7월 13일, 지금까지 표절 반대 운동이 걸어온 과정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표절 반대 운동을 지속해 온 이성하 목사(원주가현침례교회), 학계의 김진규 교수(백석대학교 구약학)와 출판계의 신현기 대표(IVP), 그리고 해외 저작권사 입장을 대변할 맹호성 이사(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가 패널로 한자리에 모였다. 사회는 청어람ARMC의 양희송 대표가 맡았다. 패널들은 두어 시간의 논의에서, 독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장외 운동 성격의 표절 반대 운동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했다.
표절 고발자들의 소회, "우연치 않게 시작했는데…온갖 위협에 시달렸다"
좌담회를 시작하며 패널로 참가한 이성하 목사와 김진규 교수의 소회를 들어 봤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김지찬·송병현 등 내로라하는 신학자와, 한국의 대표적인 초대형 교회인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표절 문제를 제기한 이다.
양희송: 먼저 이성하 목사와 김진규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표절 문제를 제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하고 나서 당사자와 주변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받았는지 말해 달라.
이성하: 처음에는 페이스북 그룹 '번역이네 집'에서 오역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다가 오역 문제가 나온 김에 표절도 한번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가 알고 있던 건 이한수 교수와 양용의 교수 정도였다. 처음 두 분에 대한 검증을 시작했는데,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커졌다. 두 교수 얘기를 공개하자 여기저기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제보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나도 놀랐다. 분량도 너무 많고, 표절의 수준과 정도가 심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시작한 게 지금까지 다룬 것만 여덟 명, 아직 조사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두 자릿수에 이른다.
이 일을 해 오면서 여러 가지 반응을 접했다. 당사자 중에는 반성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책을 절판시킨 사람도 있고, 처음에 아니라고 하다가 결국 인정한 사람도 있었다. 문제가 된 출판사와 저자들이 영업 방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는 얘기도 직·간접적으로 많이 들었다. 어떤 분은 나를 고소하려고 변호사 비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소송을 위해 증거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 이성하 목사는 독자 중심의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그는 학자들과 출판사들이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독자의 불만을 수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김진규: 나의 경우도 페이스북에 쓴 글이 발단이었다. 2012년 6월 글을 하나 썼던 게 이슈가 되고 문제가 커졌다. 그러자 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하도록 압력을 행사해 왔다. 나는 그 교회가 분란에 휩싸이지 않도록 조사위원회에 찾아가서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다는 위협을 해 와서, 그 목사의 논문을 직접 조사해 봤다. 논문을 읽으면서 상당한 표절의 흔적들을 발견해, 증거 자료를 사진으로 찍어 그 목사에게 보내면서 회개하시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목사가 나에게 침묵을 지켜 달라고 요청을 했다. 나는 교회가 내부적으로 문제를 잘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때 표절을 조사했던 조사위원장에게도 표절의 증거자료를 보냈다. 나중에 조사위원회가 당회에 더 자세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그 목사의 표절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언론에 유포되었다.
표절 사실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사건의 내력이 일파만파 퍼지게 됐다. 이 일 때문에 나는 3년 넘게 수많은 공격을 받았다. 온갖 비난과 거짓말, 유언비어와 언론을 통한 거짓·왜곡·불법 보도에 시달렸다. 나는 문제가 드러난 이상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바람직한 방향으로 잘 해결되기를 원했다.
출판사, 절판 및 독자 보상 먼저 하긴 하는데…현실적인 어려움도
양희송: 출판계 쪽의 이야기도 들어 보자. 출판사 또한 표절 문제의 또다른 당사자다. 독자들에게는 보상해야 하고, 저자들에게는 보상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독자와 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무엇이 있나.
신현기: 우선 나의 의견이 출판사 전체의 입장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 표절이 발생한 경우, 저자는 독자와 출판사에게 책임이 있고, 출판사는 독자에게 책임이 있다. 출판사는 우선 자체적으로 표절 여부를 판단하되, 저자에게 표절 여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절판과 회수는 물론 독자들을 위한 보상 조치 등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저자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저자에게 보상을 받기가 쉽지 않다. 저자에게 보상할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보상할 능력이 없으면, 모든 비용을 출판사 홀로 부담할 수밖에 없다. 저자에게 보상할 능력이 있더라도 보상할 의지가 없다면 소송을 통해서 보상을 받아 내야 한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어야 하는 출판사 업무의 특성상 지난한 소송 과정을 진행해 가기란 쉽지 않다. 결국 출판사가 모든 부담을 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재정 형편이 어려운 출판사일 경우 출판사 존립마저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독자에 대한 책임과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출판사로서는 재정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양희송: 출판사가 저자의 원고를 다듬으면서, 일정 정도 표절을 거를 수 있는 가능성은 없나?
신현기: 출판하려고 할 때, 먼저 계약서에 '제삼자의 권리를 침해하면 민형사상 책임이 있다'는 조항을 반영하고, 이 사실을 저자에게 분명히 알리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 표절에 대한 출판사 나름의 분명한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 편집 과정에서 편집인의 관련 지식이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표절을 걸러 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기계적·기술적 점검일 뿐이고, 데이터베이스도 턱없이 부족하며, 정확한 방법도 아니다.
표절을 거르기 위해 출판사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어떤 글이 남의 글을 베낀 '장물'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제대로 쓰고 저술 과정에서 저자를 잘 안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의 글이 온전히 저자 자신의 글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출판사는 편집 본연의 일에 매진할 수 있고 그래야 출판의 질이 올라간다.
하지만 밝혀진 표절에 대해서조차 출판사가 표절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후속 조치에 소홀하거나 심지어 표절 판정 여부를 저자에게 떠넘기면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무능한 출판사' 혹은 '장물아비 출판사'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 IVP 신현기 대표는 출판사 또한 독자들에게 최우선적인 대응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출판사가 떠안아야 할 고충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독자의 입장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양희송: 표절 문제는 남의 재산을 허락 없이 가져다 썼다는 점에서 저작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맹호성 이사는 저작권을 다루는 입장에서 이번 표절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또 외국 출판사들은 어떻게 보고 있나.
맹호성: 저작권 에이전시 입장에서 인용 부호 한두 개 누락한 정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재산상의 침해가 발생할 정도로 저작물 도용이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해외 몇몇 저작권사에 저작권 침해를 판단하는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문의해 봤다. 존더반(Zondervan)과 토마스 넬슨(Thomas Nelson) 출판사가 속한 하퍼 콜린스 출판 그룹(Harper Collins Christian Publishing)에서는 표절 분량이 전체의 5% 정도 되면 눈감아 주지만, 10% 정도 되면 과도한 저작권 도용으로 문제를 삼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마 다른 곳도 5%부터는 문제로 인식하고, 국내 출판사들에게 재산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될 거다.
2009년 국내에 선례가 있었다. 국내 출판사가 내는 잡지 중 10년 동안 해외 저작물을 그냥 갖다 쓴 게 있었다. 그 잡지가 저작권을 침해한 비용이 억 단위가 넘었는데, 결국 그 출판사는 그 돈을 전부 해외 출판사들에 지불했다. 지금 국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해외 출판사는 아마 그때를 참고해 이번 문제가 대충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감을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논란이 될 만한 표절 판정은 '전문가에게', 보상 등 사후 처리는 일단 '先 조치 後 논의' 해야
양희송: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문제, 그리고 판명 이후의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 보겠다. 일단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게, 일반인 입장에서는 학술적이고 난해한 문제일 수 있다. 실제로 학계나 출판계에서 어떤 절차와 어떤 기준을 가지고 표절을 가늠하는가.
김진규: 표절을 판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표절을 판정하는 기준은 국제법과 국내법이 상이하고, 국내에서도 교육부와 각 학교의 법이 다소 다르다. 먼저 직접 인용의 경우, 인용 부호를 적어도 네 단어에서 여덟 단어까지 연속된 글을 인용할 경우에는 인용 부호를 붙이고 주(註)를 다는 게 국제적인 관례다. 국내에서는 이게 상당히 완화돼 있다. 서울대 같은 경우는 연속 두 문장까지는 인용 부호를 달지 않아도 표절로 규정하지 않는다. 또 주로 학문적인 글에서는,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직접 인용 대신 간접 인용을 하도록 돼 있다. 자기 말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하라는 것이다. 대신 그것도 피인용자의 독특한 아이디어에 해당하면 반드시 주를 달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반 지식에는 주를 안 달아도 된다. 달면 오히려 일반적으로 알려진 지식의 출처를 특정인에게 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일반 지식인지 아닌지는 전문가가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는 전문성을 빼고 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이유로 가급적이면 표절 판정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좋다. 표절 판정 기준과 절차는 교육부 훈령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교육부에서 '연구 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을 2014년 발표했다. 여기에는 표절 의혹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연구를 수행한 공적 기관(대학교나 연구 기관 등)에서 표절 검증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교육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표절 제보자와 표절 피의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해 뒀고, 제보자와 피의자가 신분 노출 등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으로 막아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조사 위원으로 적어도 전문가가 50% 이상 참가해야 하고, 30% 이상은 소속 기관 사람이 아닌 외부인이 들어오도록 돼 있다. 
표절 관련해서는 교육부가 관련 규정을 잘 만든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교육부 규정대로만 하면 합법적으로 논란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개인이 표절 여부를 판정하는 건 공신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문가가 봤을 때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 나기라도 하면, 인터넷에 글 쓴 사람들이 명예훼손으로 걸릴 수 있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정당한 절차에 따라 하는 게 좋다. 출판사도 공적인 결정이 내려지면 거기에 따르면 된다.
▲ 김진규 교수는 기독교 학계가 세상 학계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교육부가 만들어 놓은 지침에 따라, 공정하고 엄격하게 표절 판정 및 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양희송: 김진규 교수님은 교육부 지침에 따라 처리하는 게 제일 깔끔한 방법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공적 기관의 심사 문제는 잠시 후 좀 더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표절 판정만큼이나 발견 이후의 문제도 중요하다. 출판계 쪽에서는 사후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맹호성: 해외 저작권사 입장을 대변하는 에이전시로서, 기본적으로 출판사에 주로 요구하는 건 절판 조치다. 책이 계속 팔리고 있으면 해외 저작권사들과 법적 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상당수 출판사들은 협조적으로 나온 상태다. 나와 저작권사 모두, 일이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것들을 보면, 성서유니온, 이레서원, 두란노 등 표절 논란이 된 도서의 출판사들은 전부 절판 조치를 했다. 현재 생명의말씀사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단, 국제제자훈련원은 예외다. 송병현 교수가 출판사를 직접 차리고 재고를 가져가서 계속 팔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국제제자훈련원이 아닌 송병현 교수가 차린 출판사와의 문제가 됐다.
신현기: 그러나 검토해야 할 게 하나 있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출판사는 표절로 판정했으나 저자는 표절을 부인하는 경우, 출판사가 독자적으로 절판 조치를 취하면 저자로부터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맹호성: 저자의 동의 없이 그냥 절판하는 것은 분명히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다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지금까지의 사례들에서는 저자가 내키지 않더라도 불가피하게 절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표절을 인정했기 때문에 절판 조치에 동의한 것으로 본다.
이성하: 어떤 분이 저에게 "당신 때문에 출판사 손해 본 게 1억 원이 넘는다"고 했다. 절판하면 그렇게 손해를 보는데 출판사가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조치를 취했겠나, 또 학자들이 자기 책 절판되기를 바랐겠나. 표절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다.
양희송: 이런 상황에서는 출판사가 먼저 절판 등의 상황 정리를 하고, 사후 발생하는 이견이나 분쟁은 알아서 처리해야 하지 않나.
맹호성: 일단 그렇게 하는 게, 과도한 저작권 무단 도용으로 인한 저작권상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 참석자들은 '표절 인정' 이상의 확실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수 쳐 주고, 표절 인정한 사람들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는 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사과'했다고 박수 쳐 주고 끝? 확실하게 조치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 있어야
양희송: 표절 반대 운동은 독자 운동, 소비자 운동의 측면이 강하다. 독자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일단 표절 도서 때문에 독자들은 오히려 원서의 번역본을 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책을 표절해서 짜깁기한 한국 학자들의 권위가 높기 때문이다. 표절 도서가 대우받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될 때 독자들의 수준이나 국내 출판 상황이 안 좋아질 수 있지 않나.
이성하: 요즘 문제 되는 분들은 어떻게 보면 고생했던 세대보다는 혜택받은 세대다. 지금 논란이 된 교수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아주 영악한 분들이다. 문제는 이 분들이 시대가 변했고 독자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걸 미처 모른다. '차세대 성서학자'라는 소리 들으면서 한동안 잘 나갔고, 강연 다니면서 여러 사람에게 존경받고, 심지어 한국교회 개혁의 기수로 나서 교계에 쓴소리 하던 분들이다.
나는 지금 이것을 한국 신학계 전체의 문제로 보진 않는다. 혹자는 "그렇게 하면 안 걸릴 교수가 누가 있겠냐"고 하는데, 나는 사람 단위로 보지 말고 책 단위로 보자고 한다. 예를 들어, 문제가 된 김지찬 교수님이나 양용의 교수님 같은 경우, 그분들의 박사 학위 논문은 아주 좋은 책이다.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책은 잠정적으로 표절이라고 보지 말고 좋은 책으로 봐 주고, 드러난 것만 갖고 얘기하자. "다 걸리는 문제 아니냐" 이렇게 싸잡지 말아야 한다.
김진규: 내 것이 아닌 것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인정해 주면 되는 건데,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한국 땅에 표절이 이렇게 만연하게 된 것은, 표절한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이 미비하다는 이유도 있다. 지난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징계 사유가 발생한 시점부터 3년까지는 처벌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표절이 발생했을 경우에 '논문을 발표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느냐 아니면 '표절이 발각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느냐다. 서울대 같은 경우 논문을 발표한 날로부터 3년 이내에 표절로 밝혀지면 징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 3년 지나면 표절이 아닌 게 되는가? 이 자체가 벌써 표절범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다. 얼마 전 경희대 교수가 연구 논문을 표절한 게 걸렸다. 그 교수는 그 논문을 발표한 지 3년이 지났다면서 징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식이면 대부분 다 징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느슨한 징계 규율을 가지고 있어서는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 사회를 맡은 양희송 대표는, 표절 문제가 크게는 한국 독자들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요인 중 하나라고 했다. 국내에 원서들이 번역되지 못하는 탓이다. 양 대표는 한국 학자들이 외국의 학문을 국내에 소개하는 '수입상' 노릇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양희송: 문제를 접하는 독자들의 반응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표절 문제가 불거지면, 일단 독자는 굉장히 불쾌해하고 저자에 대해 분개하다가, 또 출판사가 절판하면 태도를 바꿔 박수 쳐 준다. 이런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결과를 이끌어 냈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
이성하: 문제를 조금 더 명확히 보자면, 지금 표절 문제를 제기해서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 더 적다. 해결된 사람이 2/3가 넘고, 안 된 사람은 단 세 명, 김지찬·이한수·송병현 교수다. 이한수 교수 책은 그래도 절판 조치가 됐으니 예외로 하면, 두 명이 남는다. 표절에 대한 명백한 근거를 제시했을 때, 사과하고 절판 조치하는 비율이 80% 이상 되는 것이다. 시스템은 잘 가동되고 있고, 지속적으로 제보가 들어오고,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출판사·저자는 문제를 인지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절판하고, 미비하지만 보상 조치까지 하고 있다. 오히려 이렇게 안 하는 사람은 적다.
신현기: 해결되고 있다니 고무적이다. 그러나 사태를 무마하는 수준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독자 운동과 함께 표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는 '공적 과정'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와 교계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공적 과정이다. 표절 여부를 정확히 판정하는 공적 절차가 필요하고, 표절 판정이 나면 표절 당사자는 깨끗하게 표절을 인정하고, 합당한 징계를 받고, 징계가 풀리면 사안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위치로 복귀하는 공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인격을 모독하거나 소속 집단을 통째로 비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표절자도 표절 문제 제기자도 모두 다칠 수밖에 없다. 이성하 목사가 그러한 이유에서 "사람 단위로 보지 말고 책 단위로 보자"고 했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맹호성: 독자들은 표절 의혹을 받았던 교수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면 존경스러워 한다. 인정하기 힘들지만 용기를 낸 모습,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하는 모습을 높게 산다. 하지만 거기에 열광하면서 갑자기 환영과 감사의 댓글을 다는 걸 보면 솔직히 배신감을 느낀다. 이런 부분에서 한계가 있다. 결국 표절한 사람들에 대해 어떤 조치까지 이루어지게 하려면, 독자 운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까지 어느 연구 기관에서도 이 문제로 조사를 진행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신학 서적 표절 반대' 페이스북 그룹에 신학생들도 많이 있다. 그들 중에는 제보하는 학생도 있고, 통신원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공식적으로 학교에 가서는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수업 착실히 듣는다. 당장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는 학생들도 가만있는 것이다. 교수들도 동료에게 칼질이 되는 것은 피하려 하는 분위기다. 학교나 학회 등 공적 기관에서 이걸 할 수 없다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같은 제3의 공공 기관에서 한시적이거나 장기적으로 문제를 정리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해 주면 좋겠다.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걸 정리하는 게 있어야지, 한 번 문제 제기하고, 사과하면 한 번 박수 치고… 그냥 그렇게 끝나면 안 된다.
▲ 맹호성 이사는 "한국 신학계와 신학 출판계는 2015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독자 중심의 표절 반대 운동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표절 반대 운동이 여기서 머물지 말고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김진규: 인터넷상에서 의혹 제기하고, 표절 인정하고, 그러면 또 박수 쳐 주고, 이런 식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말 표절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알게 해야 한다. 학계가 '표절을 반드시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제대로 보이려면, 표절한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한다. 공식 결정이 나면 결정에 걸맞은 징계를 내릴 수 있다. 만약 사과하고 아무런 징계 조치 없이 문제를 끝내면 또 표절할 수도 있다.
먼저 기독교 대학, 기독교 신학교, 기독교 학회가 도덕적인 면에서 세상보다 나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아무개 교수가 예일대 교수 논문을 베낀 적이 있었는데, 예일대 교수가 자신의 글을 표절한 부분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한국 '국제정치학회'에 연락했다. 학회가 조사해서 판정을 했고, 표절 판정을 받아들인 그 서울대 교수는 사임했다. 세상은 되는데 왜 기독교 학회는 안 되나. 이렇게 해서 '표절하면 해임도 될 수 있구나' 하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만연해 있는, 표절이라는 나쁜 관행이 이 땅에서 근절될 수 있지 않을까.
양희송: 이제 논의를 마무리하겠다. 표절 논란은 교계 전체의 문제인 만큼, 이를 전담할 하나의 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시민단체나 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 여러 경로로 이런 제보를 받는다든지 할 수 있겠다. 그 기구가 처벌의 주체가 될 수 없겠지만, 출판사, 교회, 당사자, 교육부 등 관련 기관에 통보하는 등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성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해외에는 표절하면 안 된다는 문화가 조성이 돼 있어 별도의 기구가 필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문화가 없다. 지금 표절 반대 그룹은 한시적인 움직임이다. 이런 일들을 임의로 모인 개인들이 하는 것보다, 공신력 있는 집단에서 나서 주고, 학계가 공감하고, 신학자 자정 선언까지 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간 <뉴스앤조이>가 좋은 장을 만들어 줬는데, 다른 단체들도 나서서 도와주면 좋겠다. 임의로 모인 개개인들이 하기에는 너무 크고 힘든 문제다.
나름 격려가 되는 건 출판하기로 계약했던 교수들이 계약을 미루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각주 달고 다시 점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지금까지 한 행동이 신학계에서 워치독의 역할은 한 것 같다.
양희송: 그간 진행 과정에서 격한 반응과 맘 상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표절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인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는 이걸 제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대안과 조직을 만들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여기 모인 분들도 기여해야겠지만, 바깥으로부터 더 많은 분들의 노력과 참여가 필요할 것 같다. 아무쪼록 교계 내에서 책의 저술, 표절 문제에 대해 2015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상징적인 시기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인터뷰] 대형 교회 목사의 표절 처음 건드렸던 보수 신학자

백석대학교 구약학 김진규 교수는 대체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교단 신학교의 신학자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한인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여느 신학자와 다를 바 없는 이다.
그는 2012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느 대형 교회 목회자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김 교수의 글은 어느 특정인의 논문 표절 논란으로까지 커졌다. 특정인을 지목하고 쓴 글은 아니었지만, 김 교수는 그 사건에 휘말리면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고 한다.
보수 교단 신학자가 '교회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김 교수는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교회 개혁과 관련된 두 편의 논문을 썼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고난의 현주소>와 <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한 대응책: 성경신학적 고찰>이 그것이다. 그는 이번 논문 안에 한국교회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 불감증과 재정 비리, 성추행, 표절 같은 여러 문제들, 이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인식, 그리고 제언을 담았다.
<뉴스앤조이>는 4월 6일, 김진규 교수를 만났다. 기자는 김 교수에게 특별하게 논문을 쓴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는 자기가 유학을 떠나기 전의 한국교회는 그래도 세상 속에서 신뢰를 받았는데, 20년이 지나 귀국해 본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전혀 신뢰받지 못하는 개혁이 시급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성경은 교회 개혁에 관해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는지, 왜 개혁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보기 위해 이번 논문을 냈다고 했다.
한국교회, 왜 고난받는가?
김진규 교수에 따르면 고난을 보는 성경신학적 관점에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응보적 고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해 이루어지는 '훈계적(교육적) 고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받은 '대속적 고난',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성도들이 당하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고난', 그리고 욥의 경우처럼 의를 행해 왔지만 왜 고난을 겪는지 전혀 모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이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현재 사회로부터 응보적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불신, 조롱, 멸시를 당하는 것은 그간 범한 여러 가지 죄악들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기윤실의 2013년도 설문 조사 결과를 근거로 들었다. 한국교회가 가톨릭이나 불교보다 봉사와 사회 기여도는 앞서지만, 신뢰도는 꼴찌였다.
한국교회가 왜 사회적 신뢰를 잃었을까. 김 교수는 대체로 그 원인을 지도자에게 있다고 봤다. 그가 제시한 교회 세습 문제, 성직자의 재정 비리 문제, 성 문제, 표절과 대필 문제는 대부분 지도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후 교회의 대응 방식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문제를 일으킨 목사를 제대로 징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그는 이런 모습들로 인해 교회가 사회의 신뢰를 잃는다고 했다.
▲ 미국에서 표절은 중범죄라고 배웠다는 김진규 교수. 그러나 한국교회는 표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정만
"대한민국에 군대만큼 건드리기 힘든 조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최근 모 사단장이 성추행을 했다가 실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때요? 한 목사는, 여러 교인들을 성추행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교단에서 징계를 하지 않아 사회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는 기업의 총수들이 재정 비리로 교도소에 가는데, 교회에서 헌금 유용의 경우에 '은혜로'라는 미명 아래 덮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세상에서는 장관 후보자가 논문 표절로 낙마하는데, 교회에서는 표절이나 대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교회에서 세상보다 훨씬 뒤떨어진 도덕성을 갖고 있으니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는 특히 표절 문제에 관해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20여 년 넘게 생활했던 그는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 목회자들은 표절과 대필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국 같으면 표절은 중대 범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김진규 교수는, 표절 문제가 사회적, 윤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성경적 차원에서 봐도 분명한 중대 범죄라고 했다. 그는 목회자가 그런 중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학위를 따려고 하는 행위는 탐심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는 '표절은 십계명 중 8, 9계명을 어긴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남의 것을 훔쳤으니 8계명을 어긴 것이고, 남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니 9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학위, 곧 명예를 위해 남의 것을 탐낸 것이니, 10계명을 위반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보다 명예를 더 소중히 여겼으니 우상숭배, 즉 1, 2계명도 위반한 게 됩니다."
지도자의 범죄에 대해 도전하면, 고라와 다단, 아비람처럼 될까?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김진규 교수도 목회자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를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참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과 교인들 앞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에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기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도 도전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만연하다고 했다. 김 교수 자신도 어릴 때부터 교회 지도자의 잘못에 대해 말하는 걸 금기시해 온 한국교회의 문화대로 살았다고 말했다. 교인들은 지도자들의 죄를 알고 있어도 '지도자에게 도전하면 안 된다'고 배워 왔기 때문에 문제를 방치하거나 은폐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모세에게 도전했다가 죽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에게 대적했다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를 이용해 많은 교회에서 목사가 문제를 일으키면 주로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처벌하실 테니 교인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라와 다단, 아비람처럼 될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이는 사례를 잘못 든 겁니다. 민수기 16장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지, 지도자들의 죄를 덮으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목회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민수기 16장이 아니라 역사서의 엘리야와 나단 같은 선지자들의 사례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아합이나 다윗 왕에게 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왕들이 지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에게 대들었다고 하나님께 죽임당했나요?
심지어 기둥 같은 사도로 여겨졌던 베드로가 잘못하자, 한참 후배 사도인 바울이 그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사건에 대해 주석하기를 '여기에 직위나 직분보다 진리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이제 지도자들의 중대한 죄를 덮어놓고 봐줄 게 아니라 치리해야 한다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권징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일차적으로 교회 내부의 일은 교회 내에서 처리하는 게 맞다.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에도 교회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면한다. 그래서인지 교회에는 내부 문제를 사회법으로 처리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가 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교회 문제를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고 있다. 온갖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성경 말씀에 반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긴 하지만, 교회가 문제를 잘 해결할 거라는 희망이 없는 탓이다.
김 교수는 다시 자신의 사례를 들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자고 했다.
"저는 2012년도 페이스북 사건이 터진 이후에 여러 단체, 사람들로부터 약 10여 차례 인권유린을 당했습니다. 그중에는 거짓말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 언론사의 거짓·불법·왜곡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이 있고, 강압적인 사과의 압력으로 인해 강요죄에 해당하는 것도 3건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인권을 유린한 단체들과 개인들이 모두 교인들이고 기독교 단체·언론인데, 제가 고소한다면 사회에서 기독교 이미지가 더 구겨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세상 법정에서 고소하는 것이 상책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 처음에는 '교회 개혁'에 부정적이었지만, 한국교회의 민낯을 접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김진규 교수. 그는 개혁 운동이 갈 길도 멀고 희생도 크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자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일차적으로는, 문제가 있으면 교회의 치리를 기다리며 인내하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권면에도 지속적으로 죄를 회개치 않고, 교회나 교단적인 차원에서도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범죄가 법률상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저의 말보다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한 칼빈의 의견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6장을 주석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적절한 법적 대응을 금하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알면서 그냥 두는 것도 범죄…교회 개혁, 갈 길 멀지만 열매는 언젠가 열려
김 교수는 중대한 죄를 짓는 사람들을 확실히 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파급효과가 점점 커져서 결국 공동체를 물들게 할 것이라고 봤다. 그는 충현교회가 시작하자 곧 전국적으로 퍼진 교회 세습 문제를 예로 들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김진규 교수는 이것이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인들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다. 목회자가 중대한 죄를 지었을 경우 이를 가만히 놔두는 것은 죄를 전염시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문제인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문둥병자를 진 밖으로 내보내도록 규정한 건, 영적 의미에서 고질적인 죄를 갖고 있는 자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서 격리하는 겁니다. 이것은 죄악이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죄를 지을 경우, 그냥 덮어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범한 사람이 죄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고, 알고 범하는 자는 더욱 뻔뻔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우글거리게 된다면, 교회 공동체는 죄의 파급효과 때문에 공동체를 전부 망치게 될 겁니다."
김 교수는 사실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서 왔다거나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은 아니다. 처음에는 교회 개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김 교수는, 페이스북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문제와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체감했다. 그 이후 김 교수는 교회 개혁의 일선에 선 목회자들의 어려움과 희생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개혁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지리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치러야 할 희생도 엄청날 것이라고 했다.
김진규 교수는 영국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 얘기를 했다. 윌버포스는 반세기 가까이 노예제 폐지를 위해 힘써 싸우다가 마침내 노예해방 소식을 듣고 눈을 감은 사람이다. 김 교수는 교회 개혁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 열매를 볼 것이라고 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46년 동안 싸웠어요. 24세에 의원이 돼 가지고, 노예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20년 걸렸습니다. 또 노예제를 완전 폐지하기까지는 46년이 걸렸지요. 그러니까 사실 윌버포스의 노력의 열매는 그 다음 세대가 따게 된 거죠.
교회 개혁을 위해 앞장 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듣습니까? 그러나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외침 속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윌버포스의 뜻이 이루어졌듯이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비교적 단시간에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켰듯이, 한국교회가 서구에 비하면 정말 짧은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신학적·신앙적·인격적 미성숙들로 생긴 문제들도 머지않아 개혁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김진규 교수의 논문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PDF 파일)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2016년 10월 17일 월요일

[뉴스앤조이 기고글] 삶으로 드리는 살아 있는 예배

오늘날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삶의 문제가 아닐까? 도덕성은 곧 우리의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 생활, 말씀 묵상, 성령 충만한 삶, 전도와 제자 훈련, 예배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런 영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행위 문제라고 하면 누가 온전하다고 하겠는가? 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도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그들보다 낫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들보다 떨어질 때가 많다. 우리의 행위가 그들보다 떨어질 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신뢰하지 않게 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도 결국 행위가 문제가 되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
이사야 1장 11-13절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렇다.
이런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제물을 바쳤다.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들을 열심히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열심히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 등 모든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나님께 부담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14절). 너희가 드리는 예배와 헌물이 내가 지기에 너무나 힘들다. 그러니 그만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드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긴다고 하신다. '가증스러운 것'(토에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자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이다(레 18:22; 20:13; 신 7:26). 무엇이 이들의 종교 생활을 하나님께 무거운 짐,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나님은 이들에게 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손을 펴서 도움을 요청해도 눈을 가리고 응답하지 않겠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5절)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기도에 대해 전혀 응답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귀를 닫아 버리는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예배 행위를 지긋지긋하게 여기시는지 그 이유를 중간중간 말씀하신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곧 행위의 문제였다. '악한 행실'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악행 대신 선행과 정의를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정의란 17절에 나오듯이 사회적인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힘없는 자들의 소송을 공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예루살렘은 한때 정의와 공의의 도성이었으나 이 당시에는 악을 행하는 살인자들이 우글거리는 도성이 되었고, 예루살렘 권력자들은 도둑들이었고 뇌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소송이 공정하게 행해지지 않았다(21절). 이들의 행위가 바로 문제였다.
잘못된 행위는 우리의 종교 생활 자체를 무효화한다는 사실을 이사야 1장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제물과 절기 준수가 의미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부패한 상태에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예배도 하나님께 무거운 짐만 지워 드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일부 종교개혁 후예들의 오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행위구원론을 깨뜨리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개신교에서는 귀가 따갑도록 가르친다. 이를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오해한다. 이런 오해에 큰 함정이 숨어 있다.
이런 오해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루터가 종교개혁 할 당시에도 나타났던 문제이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이런 오해가 오늘날 구원파 이단이 갖고 있는 구원관과 일치하는 견해이다. 루터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중에 깨닫고 성도의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여전히 루터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종종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니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언제라도 이런 오해에 빠지기 쉽다.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항상 야고보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는 항상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롬 3:20-22, 28; 갈 2:16; 3:2, 5). 많은 본문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롬 3:27; 9:32; 11:6).
바울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점이다. 이것이 이들의 함정이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이들의 문제점이었다.1) 이들은 십계명을 주신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를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성경은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한다(요일 3:15).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연 십계명을 이런 관점에서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십계명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제2, 3의 용도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십계명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십자가로 달려가 죄 용서 받도록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주신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이들에게 필요 없게 된다.
이와 똑같은 함정에 빠졌던 종교가 중세의 가톨릭이었다. 이들은 믿음 외에 행위도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위가 온전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에 답을 할 수 없다. 이 고민이 중세의 루터가 했던 고민이다. 자신의 행위를 생각할 때 도저히 구원 얻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회개 기도하고 고행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필자가 종종 행위구원론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 드는 실례가 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자신의 피를 조금 더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과 똑같다. 나의 죄를 씻는 것은 100%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은 것이지 만약 내 피가 1%라도 들어 있다면 내 핏속에 들어간 원죄 때문에 나의 죄는 씻을 수 없다. 오직 100%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 곧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내 행위를 1%라도 의지하게 되면 구원의 실격자가 된다. 그 행위는 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답은 야고보서에서 가르쳐준다. 먼저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하지 말라.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한다. 야고보서의 '선행'은 믿는 자이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열매이다. 이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여기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선행이 없다면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역설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진정한 믿음의 증거임을 알 수 있다.
1) 샌더스(E. P. Sanders)가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를 주장한 이후에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고 주장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는 편향된 주장이라고 본다. 샌더스가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행위구원론과 관련된 자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쿰란공동체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주석하면서 "의인"을 "율법을 행하는 자"(doer of the Law)라고 해석하고 있다. 샌더스는 왜 이런 자료는 보지 못하는가?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다. 언뜻 보면 어떻게 성경에서 이렇게 대조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먼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을 함께 보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1-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으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1-24)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친숙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다. 분명코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행위를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제단을 바쳤을 것이라는 논리이다(참고, 롬 4:18-22).
그런데 야고보는 이삭을 바친 것을 행위의 관점에서 본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진짜 믿음으로 입증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약 2:24).
이런 관점에서 믿음을 보게 되면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듯이 이런 순종하는 행함 없이는 절대 그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절대 구원을 줄 수 없는 가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서 2장 24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쉽게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관을 요약하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항상 순종이 포함된 진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런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는 순종의 행위가 포함된 믿음이 있고, 순종의 행위가 빠진 가짜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믿음은 바로 두 번째의 가짜 믿음을 두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는 말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바울과 야고보를 대조해서 설명한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야고보가 공격하고 있는 가짜 믿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위구원론자는 개신교인 중에는 극히 드물 것이다. 오늘날 문제점은 우리가 믿노라고 고백하지만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삶 때문에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는 선행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이다. 나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인가? 진정한 믿음이라면 분명히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행은 살아 있는 예배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로 드려진다는 사실을 밝힌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을 잡아서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제물의 몸을 각을 뜬 후에 번제단 위에서 살랐다. 바울은 바로 이 동일한 이미지를 우리 몸에 적용하고 있다. 번제물로 드려진 제물의 몸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산 제물로 드려진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 답이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12:2)함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몸으로 하는 행위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릴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행동 지침이 나온다. 성경은 우리가 성도로서 합당히 행해야 할 바를 이미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다음 덕성의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는 분야를 뽑은 것이다. 사랑, 긍휼, 정의, 정직, 경건, 겸손, 온유, 섬김, 충성, 정절, 인내, 절제, 화목, 양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덕성의 항목들이다. 이를 실천하면 선행의 기본 훈련이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철저히 연구하면 우리의 선행의 지침이 나오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십계명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오늘날 성도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십계명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는 성경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정의 실천의 영역이다. 요즈음 외국인 노동자들과 새터민과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선행을 실천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예배당에 갇힌 신앙 중심에서 삶의 예배 중심으로
이사야 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들은 종교 생활에는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일상의 행위가 문제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인들 문제점이 이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갇힌 신앙 중심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교회 집회는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도 부지런히 다니지만 세상 속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그렇다고 교인들의 신앙적 열정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더 문제가 심각한 그룹은 교회에 다니지만 성경도 전혀 읽지 않고, 개인적인 기도 생활도 전혀 없고, 제자도에 대한 헌신도 전혀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귀중한 진리는 행위에 문제가 생기면 종교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이 없는 신앙을 하나님은 우상숭배나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행위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종교 생활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겠는가? 오늘날도 이 진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의식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부담스럽고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배에 앞서서 우리의 말씀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상의 선행이 우선되어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6일간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일에 우리의 삶을 함께 묶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예배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힘써야 할 분야는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삶의 개혁에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다음 항목들을 점검하면서 자기 개혁을 위해 함께 힘써 보자.
*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은 자기희생을 통해 표현된다.
* 어려움에 처한 자를 볼 때 마음속으로부터 긍휼히 여기는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삶에서 나타나는가?
* 나는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가? 가족, 교인, 친구, 이웃, 직장 동료 등.
* 나의 생각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나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거룩한 생각으로 훈련할 수 있겠는가?
* 나는 어떤 사건을 접할 때 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가, 아니면 일의 정의로운 해결을 먼저 생각하는가?
* 나는 금전 문제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직한가?
* 나의 언행은 경건한가?
* 나에게 교만한 모습은 없는가? 나는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는가? 겸손의 기본적인 개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빌2:3).
* 나의 거친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적은 없는가? 매사에 온유한가?
* 나에게 진정으로 섬김의 정신이 있는가? 아니면 군림하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가?
* 나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적당히 눈가림으로 때우려는 마음은 없는가?
* 나는 정절을 잘 지키고 있는가?
* 나에게 절제력과 인내심은 있는가?
*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가?
* 매사에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 나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가? 혹시 잘 지켜지지 않는 계명이 있다면 어떻게 지키겠는가?
잠언은 우리의 행위를 위한 좋은 안내서이다. 가능하면 매일 읽으면서 삶을 고쳐 보자.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2016년 10월 12일 수요일

[기독일보 보도] 청중들 뇌리에 '그림'으로 남는 설교를 하려면

김진규 교수의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 대해 기독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보도내용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누르세요.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4998/20151012/%EC%B2%AD%EC%A4%91%EB%93%A4-%EB%87%8C%EB%A6%AC%EC%97%90-%EA%B7%B8%EB%A6%BC%EC%9C%BC%EB%A1%9C-%EB%82%A8%EB%8A%94-%EC%84%A4%EA%B5%90%EB%A5%BC-%ED%95%98%EB%A0%A4%EB%A9%B4.htm

[월간목회 보도]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 (2016년 9월호; 화제의 책)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 책이 2016년 9월호 <월간목회>의 "화제의 책"으로 실렸습니다.







[목회와신학 서평]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2015년 12월호)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 대한 서평이 <목회와 신학> 2015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서평자는 ACTS의 설교학 교수인 신성욱 교수이고, 제목은 "'전달형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이라는 제목으로 Book 리뷰 섹션에 실렸습니다.




[도서 출판]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 (생명의 말씀사, 2015)

(아래 링크를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책 소개 내용입니다.

<책 소개>

 이 책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생명력의 원리와 감동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발하는가?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감동과 감화를 일으키는가?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약성경의 히브리 시인들이 사용한 언어에서 찾는다. 히브리 시(詩)라고 하면 단지 구약성경의 시가서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선지서 대부분이 시(詩)문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시의 이해는 시가서 뿐만 아니라 선지서의 이해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히브리 시의 3가지 두드러진 문예적 특성은 그림 언어(이미지), 대구법과 생략법이다. 생략법은 설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생략하고, 이 책은 그림 언어와 대구법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필자는 생동감과 생명력의 원리의 핵심으로 ‘그림 언어’(image)를 소개한다. 그림 언어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도록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말들을 가리킨다. 그림 언어가 어떻게 청중의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발하는가?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해방식이라고 워런 위어스비는 말한다. 오늘날 TV, 영화, 드라마 등 시청각물은 시청자의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놓는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청중들은 이미 마음속에 이런 수천수만 장의 그림들을 머리에 새기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어떻게 이들의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들을 바꿀 수 있겠는가? 이 과제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의 청중들의 뇌리에 새겨진 그림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들의 마음속의 영상을 능가하는 그림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속의 그림이 바뀌게 되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래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설교학자들은 그림 언어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설교학 책들은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기여하고 있는 점은 그림언어의 작동원리를 비롯하여 그림언어의 다양한 종류들과 무엇보다 현시대에 어떻게 그림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 점이 특별한 기여이다. 필자는 시가서 전공자로서 먼저 성경속의 그림 언어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뿐만 아니라 맥스 블랙의 “기호 맥락” 개념과 고대 근동의 유사 이미지 해석과 오트마 킬의 고대 예술품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최첨단의 이미지 해석 이론들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학문적으로 어렵게 푸는 책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점이 장점 중에 하나이다. 
  그림 언어의 사용의 편의를 위해서 그림 언어의 분류도 전통적인 수사학적 분류가 아니라, 그림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분류하고 있고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림 언어를 사용하는 주된 수사기법인 은유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의인법, 환유법, 제유법, 우화, 비유, 상징법 등이 그림 언어의 관점에서 어떻게 은유법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누구나 이런 기법들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특히 그림 언어 사용을 성경 속에 제한하는 좁은 견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현시대에 효과적으로 그림 언어를 사용하기 위한 비법을 가르쳐준다. 현시대에 호소력 있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미지의 현대화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한다. 자연속의 그림 언어 사용법, 사회문화 속의 그림 언어 사용법, 도시 사회의 그림 언어 사용법, 과학기술속의 그림 언어 사용법, 연령·성별·계층별 그림 언어 사용법, 스포츠·영화·드라마속의 이미지 사용법, 현시대의 사상적 흐름속의 이미지 사용법, 상징적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미지의 현대화의 원리를 가르쳐준다. 또 이런 그림 언어들을 어떻게 수집할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야기를 예화라는 그림 언어로 사용할 경우에는 내러티브 이론을 도입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방법까지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감동과 감화의 원리를 소개한다. 이는 바로 “대구법”(parallelism)이 답이다. 유명한 설교학자인 브라이언 채플은 “반복이 가장 강력한 구두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설교학에서는 주로 대구법이나 반복법에 대한 중요성은 많이 강조해왔지만, 성서학에서 1980년대 이후에 이룬 대구법의 “강화 강조의 원리”를 아직까지 설교학에 도입한 학자는 거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이후에 히브리 시의 이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쿠걸과 올터의 대구법 이론을 설교에 도입하고 있다. 나아가 벌린이 이들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포괄적인 대구법이론을 도입함으로써 현시대에 이룬 대구법의 탁월한 업적들을 설교학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 설교학자들이 강조해온 대구법의 단순한 분류를 뛰어 넘어 성서학의 최첨단에서 다루는 대구법 이론을 도입하여 어휘적-의미론적 대구법, 문법적 대구법, 음성학적 대구법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대구법 이론을 다루면서 어떻게 설교에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도 역시 딱딱한 이론이지만,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탁월한 설교자들의 설교문을 분석하면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설교적인 관점에서 이 책이 대구법 사용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점은 대구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있다. 구체화를 통한 강화의 원리, 초점화를 통한 강화의 원리, 이미지를 사용한 강화의 원리, 극화를 통한 강화의 원리, 과장법을 통한 강화의 원리, 직유나 은유를 통한 강화의 원리, 점강적 반복을 통한 강화의 원리, 후렴을 사용한 강화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대구법 사용의 비법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2, 3부의 마지막에는 성경과 교회역사속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문을 분석하면서 그림 언어와 대구법 사용 방법을 분석해내고 있다. 실례들을 통하여 어떻게 그림 언어와 대구법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본서를 통하여 탁월한 설교자들이 구사했던 생동감과 생명력이 넘치는 이미지와 감동과 감화를 유발하는 대구법을 이제는 누구나 쉽게 배워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